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공법(貢法)이 백지화된 지 6년이 지난 1436년 2월 23일에 세종은 다시 공법을 거론했다.   

“근래에도 답험(踏驗)의 폐단이 많은데, 조신(朝臣)들은 각각 그 소견을 고집해서 의논이 분분하여 따를 바를 알지 못하니, 어떻게 이를 처리하겠는가. 공법이 좋은데 시행하고자 해도 하지 못하고 있다. 향후 1∼2년 동안 시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5월 21일과 5월 22일에 영의정 황희 등 의정부는 공법에 대해 논의했다. 의정부는 “각 도를 나누어서 3등으로 하되, 경상·전라·충청도를 상등으로, 경기·강원·황해도를 중등, 평안·함경도를 하등으로 하고, 토지의 품등은 토지대장대로 3등으로 나누어 세액(稅額)을 정하소서”라고 아뢰었고 세종은 윤6월 15일에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두었다.

10월 5일에 의정부는 호조의 보고에 의거해 토지의 등급을 나누어 수세할 것을 세종께 아뢰었다. 그러면 10월 5일의 실록을 자세히 살펴보자.   

의정부에서 호조의 정장(呈狀)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요사이 교지를 받았는데, 그 교지에, ‘…내가 일찍이 공법을 시행하여 답험의 폐해를 영구히 없애고자 모든 대소 신료들과 서민들에게까지 물어 보매, 시행하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적고, 시행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백성들의 의향을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정의 의논이 어지러워 잠정적으로 정지하고 시행하지 않은 지가 몇 해가 되었다. … 호조에서는 전대의 폐단이 없는 법을 상고하고 장래에 오래 전할 만한 방도를 참작하여 시행하기에 적합한 사목(事目)을 상세히 마련하여 아뢰라’ 하셨습니다.

(중략) 신 등은 멀리는 옛날의 제도를 상고하고 가까이는 시의(時宜)를 살펴서 여러 해의 중간을 비교하여 일정한 법을 이루었는데, 지금 옛날의 토지의 적성에 따라 토질을 분변하는 제도를 대략 모방하여 여러 도의 토지의 품등을 먼저 정하여 3등으로 삼았는데, 경상·전라·충청의 3도를 상등으로 삼고, 경기·강원·황해의 3도를 중등으로, 함경·평안의 2도를 하등으로 삼았으며, 또 전적(田籍)의 상·중·하 3등에 의거하여 토지의 품등을 나누어, 각도와 토지 품등의 등급으로 수조하는 수량을 정하여, 상등도의 상등전은 매 1결에 18두로, 중등전은 매 1결에 15두로, 하등전은 매 1결에 13두로 정하고, 중등도의 상등전은 매 1결에 15두로, 중등전은 매 1결에 14두로, 하등전은 매 1결에 13두로 정하고, 하등도의 상등전은 매 1결에 14두로, 중등전은 매 1결에 13두로, 하등전은 매 1결에 10두로 정하고, 제주의 토지는 등급을 나누지 않고 모두 10두로 정하오니, 이와 같이 하면 옛날의 10분의 1을 징수하던 법과 건국 초기의 수세하던 수량에 비교해도 크게 경한 편입니다. 

(중략) 비록 흉년을 당하면 혹시 조금 가중하다는 의논이 있기도 하겠지마는, 풍년에 징수한 것이 이미 경하였다면 또한 이것으로 저것을 보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 이것으로써 일정한 법식으로 정하여 1, 2년 동안 시험해 보소서“ 하니, 세종은 그대로 따랐다.

이 법안은 1430년에 호조가 마련한 토지 1결당 10말 징수 세법보다 훨씬 세련된 법이었다. 다만 풍년인가 흉년인가는 고려되지 않았지만 공법이 마련됐으니 이제 시행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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