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438년 7월 10일에 세종은 공법에 대해 다시 거론했다. 이번에는 경상·전라 양도의 백성들 가운데 공법의 시행을 희망하는 자가 3분의 2가 되면 우선 시행하려는데 대신들이 의논하라고 명했다. 

대신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영의정 황희, 우찬성 이맹균 등은 먼저 강원·황해부터 시행하자고 하고, 우의정 허조는 답험손실법을 그대로 쓰자고 하고, 좌찬성 신개, 좌참찬 조계생, 병조판서 황보인, 공조판서 성억, 참판 유계문 등은 임금의 말씀대로 하자고 했다. 또 병조참판 신인손은 시기상조라고 하고 겸판호조사 안순은 감사가 민심을 들은 뒤에 다시 논의하자고 하자고 했다. 

이조판서 하연은 공법의 가부를 민간에 물은 연후에, 9등급으로 나누어 거두는 공법을 시행하라고 하고, 호조판서 심도원은 경상·전라도 백성들에게 물으면 시행을 원하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대세에 쏠려 반대할 것이라며, 무조건 시행하라고 했다.  

세종이 말하기를 “논의가 이렇게 일치하지 않으니 내일 다시 의논하도록 하라” 했다. 

왕조시대에도 토론이 이렇게 활발했다. 요즘 문재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난상토론을 강조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을까. 

다음날인 7월 11일에 안순·신개·조계생 등을 불러 다시 의논하게 하니, 이들은 우선 경상·전라 양도에 시행하라고 아뢰었다. 이에 세종은 양도에 공법을 시험 실시하라고 명했다. 

3개월 후인 10월 12일에 세종은 장단현 관송 들판에 머물렀다. 이보다 앞서 경상도 관찰사 조서강과 전라도 익산 고을 백성 6백명이 장마로 전답이 침수돼 조세를 면세해 달라고 요청했다. 세종은 호조에 즉시 내리어 의논하게 하니, 호조는 온통 손실된 것이 아니면 조세 면제가 불가하다고 아뢰었다. 

이에 세종은 면세를 불허했는데 장단현 현장에서 좌찬성 신개가 “전라도의 옥야와 경상도 낙동강이 물에 잠겨 한 폭의 벼도 없다면서, 공법을 시행함에 있어서 면세를 검토하소서”라고 아뢰었다. 세종은 도승지 김돈 등에게 자문을 구하니 신개의 의논을 좇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세종은 환궁한 뒤에 의정부와 의논하겠다고 했다. 

10월 15일에 세종은 신개의 의견에 대해 대신들의 의견을 들었다. 최사강은 만약 관찰사가 조사하면 소송이 많아질 것이니, 별도로 조관을 보내자고 했고, 영의정 황희는 물에 잠긴 땅이라면 면세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따로 조관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했다. 세종은 “관찰사를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조관을 보내서 그 썩어 손상된 곳을 심사한 뒤에 시행하고자 한다” 하고, 곧 경상도와 전라도에 조관을 보냈다.

어느덧 공법을 시행한 지가 3년이 되는 1440년이 됐다. 세종은 공법 시행을 위해 보다 정밀한 과세 방안을 정했다. 각 고을의 지품의 등수를 어느 고을은 상등으로 삼고, 어느 고을은 중등으로 삼고, 어느 고을은 하등으로 나누어 삼등으로 만들도록 했다. 

한편 세종은 1440년 7월 5일에 공법 시행의 폐단에 대해 검토하라고 전교했다. “공법을 이미 경상·전라 두 도에 시험했으나, 한 도 내에도 땅의 기름지고 메마름이 같지 않은데 세를 거두는 것은 한결 같아서 백성이 병통으로 여기니, 다시 자세하게 정하여 아뢰라”고 한 것이다. 

세종은 정말 성군(聖君)이다. 백성들의 원망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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