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예상을 깨고 승리했다. 예상을 깼다는 것은 미국 주류 언론의 여론조사 예상치가 틀렸다는 뜻이다. 선거 직전까지도 대부분의 미국 언론은 힐러리의 승리를 예상했다. 미국의 주요 여론조사 기관이나 전문가들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숨어있던 표(Shy Trump)’는 찾아 내지 못했던 셈이다. 미국의 현실에 절망하고 분노하는 유권자들, 특히 중산층 이하의 백인들은 그동안 조용히 침묵하다가 선거 당일 한꺼번에 그들의 분노를 폭발시킨 것이다. 대이변을 만들어낸 핵심 동력이라 하겠다.

세계화 전략의 파산선고

미국 언론은 이번 대통령 선거를 ‘역사상 가장 더러운 선거’라고 평가했다. 누가 더 자질이 훌륭한가, 또는 어느 쪽 정책비전이 더 적절한가 등의 논쟁은 설 땅이 없었다. 결국 누가 더 비호감이냐, 또는 누가 더 부정적인가의 대결구도로 프레임이 형성됐다는 얘기다. 이 싸움에서 온갖 막말에 성추문, 심지어 기본적인 인격조차 의심받던 트럼프가 당선됐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적지 않다. 물론 힐러리 민주당 후보에 대한 비호감은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는 것도 선거 결과가 그대로 말해주고 있다.

미국의 유권자들은 이번 대선을 통해 한마디로 워싱턴 정가를 주름잡았던 ‘정치적 기득권세력’을 ‘응징’한 것이다.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민주당 정권과 공화당 정권을 왔다갔다 해봤지만 국민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는 것이 이들의 결론이다. 아니 삶의 질은 더 추락하고 있다는 절박함마저 보였다. 이에 절망하고 분노한 다수의 백인 중하층 유권자들이 강한 톤으로 힐러리로 상징되는 미국정치의 기득권세력에 반기를 들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분노의 정치(The Politics of Anger)’는 위험하지만 매력적이다. 자칫 벼랑 끝으로 떨어질 수도 있지만 리더의 역량만 담보된다면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힐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선도한 선각자들은 시대가 만든 분노와 절망감을 정치적 에너지로 승화시킨 주역들이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그랬고 프랑스 혁명도 그랬다. 중국의 근대화 과정과 한국의 민주화 과정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미국의 트럼프 당선자가 과연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분노의 정치’가 폭발하는 것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확산된 신자유주의의 파산을 의미한다. 국가의 부(富)는 높아지고 있다지만 중산층 이하의 국민들은 더 궁핍해지고 양극화는 점점 심화돼 왔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사람들, 기성 정치질서와 경제질서에 더는 인내할 수 없었던 ‘앵그리 화이트(angry white man)’가 그 주역이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미국만의 것이 아니다. 남서부 유럽 등에서는 이미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의 상황은 미국보다 더 열악하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도 내년 대선에서 ‘분노의 폭발’이 일어날 것인가. 이번 주말 광화문 광장을 메울 분노의 함성을 귀담아 들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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