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명의 개국공신 유백온(劉伯溫, 1311~1375)은 점술에 능한 도사로 알려져 있다. 민간에 전승되는 각종 도참서, 관상, 점술에 관한 책들은 대부분 그의 이름을 빌린다. 많은 의학 서적들이 황제나 신농의 이름을 빌리는 것과 같다. 하기야 정통철학을 자처하는 유학에서도 공자의 이름을 빌린 경우가 많으니 가탁(假託)은 자신의 저서나 문장에 권위를 싣고자 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불경이나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불경의 대부분이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거나 성경의 대부분이 예수께서 가라사대로 시작하는 것도 가탁이라고 한다면 불경죄에 해당할까? 민중들은 잦은 사회적 동란과 혹독한 전염병이 돌 때 유백온의 저작으로 알려진 이러한 책들을 믿고 의지하기도 했다.

유백온의 이름은 기(基)이다. 그러나 이름보다는 자를 붙여서 유백온이라고 하는 것이 익숙하다. 제갈량보다는 제갈공명, 장량보다는 장자방, 소식보다는 소동파가 더 익숙한 것과 같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신화적 존재로 변한다. 유백온은 청년시절에 이미 수많은 책을 읽었다. 그는 여흥(旅興)이라는 자작시에서 벗이 멀리서 찾아오면(有朋自遠來), 종일 토론하고(講論窓朝曛), 하나라도 모르면 부끄러워(一藝恥不知), 전에 들었던 것을 높이 생각한다(高踏躐前聞)라고 했다. 호학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23세에 시험을 보러 서울로 갔다가 친척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천문에 대한 책을 한 번 보고 다음 날 다시 찾아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외웠다고 한다. 서점 주인은 그 책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다 외운 사람에게 다른 책을 주지 왜 그것을 주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의 놀라운 기억력과 넓은 견문을 강조하기 위한 전설일 것이다. 그는 천문, 기상, 역법, 군사,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1360년, 주원장이 남경에서 인재를 모을 때 50세의 유백온은 스스로 찾아갔다. 주원장은 나의 장자방이라고 극찬했다. 유백온은 주원장을 도와 명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명왕조의 기틀은 그가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원장이 공신록을 주고, 재상에 임명했으나 그는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나 홍무8년(1375)에 호유용(胡惟庸)의 탄핵을 받고 울화가 치밀어 죽고 말았다. 재주는 장자방보다 못하지 않았지만, 불행히도 처세술은 어림도 없었던 것 같다. 전제왕조에서 재능은 출세에 도움이 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 군사전문가, 정치가, 문학가였던 그의 시는 웅대, 호방, 질박, 청신이 특징이다. 어느 날 유백온은 친구들과 항주 서호에서 술을 마시며 놀다가 전당회고득오자(錢塘懷古得吳字)라는 52구나 되는 오언시를 지었다. 그 가운데 한 수이다.

치혁수하극(鴟革愁何極) 양구조불우(羊裘釣不迂) 
정홍모남거(征鴻暮南去) 회수회순로(回首懷蓴鱸) 
술 담는 부대에 근심을 어떻게 채우고, 
양가죽 갖옷 입은 낚시꾼은 돌아가지 않는다. 
길 떠나는 기러기는 남쪽을 그리워하며 
고개 돌려 순로를 생각하네. 

마지막 구절의 순로는 원래 순갱노회라는 고사성어를 줄인 말로 진(晋)의 장한(張翰)이 고향의 특산물인 순나물국과 농어회가 먹고 싶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한 고사에서 유래됐다. 그가 늘 자신을 춘추시대의 범려(范蠡), 후한의 엄광(嚴光), 진의 장한과 비유했던 것으로 미루어 정치에서 물러나 어부나 나무꾼이 되어 살고 싶은 심정을 그린 것이다. 알고도 행하지 못했으니 유백온을 지혜롭다고 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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