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권운동가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92) 할머니가 22일 오후 서울시청 본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위안부 이야기’ 강연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서울시, 위안부 입증자료 담은 사례집 발간 기념 강연회
증언과 입증자료 접목한 첫 사례집, 참가 시민에게 제공

[천지일보=이지수 기자] 1938년 3월 일제의 ‘처녀공출’에 의해 중국으로 끌려간 박영심은 어떻게 임신한 상태로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1941년 병원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얘기에 속아 언니와 함께 필리핀으로 간 김소란(가명)은 어떻게 감시와 폭행 속에서 살아남아 위안부 피해를 증언할 수 있었을까.

서울시는 서울대학교 인권센터와 함께 지난해 12월 31일 발간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사례집과 관련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22일 서울시청 3층 대회의실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박원순 시장은 인사말에서 “할머니들이 원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라며 “우리는 생존자뿐 아니라 이미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그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시민들이 정의의 힘, 평화의 힘으로 할머니들의 손을 놓지 않으면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며 “저도 할머니들이 여성의 존엄함을 회복하고 정의의 역사가 이 땅에 실현되는 날까지 함께 하겠다”고 말했다.

강연은 사례집 저자 중 강성현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교수와 박정애 동국대 대외교류연구원 연구원이 맡았다. 이들은 사례집에 실린 미·중 연합군 공문서, 포로심문자료, 스틸사진, 지도 등 역사적 사료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된 이야기를 들려줬다.

◆문서와 사진이 말하다

일본 정부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에도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인하고 있다. 미국 CNN은 지난 6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중 한국과 중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위안부 20만명을 강제로 징집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지난 7일 “지금까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 군이나 정부에 의한 강제 징집을 보여주는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날 소개된 사례집에는 일본군이 중국, 필리핀 등지에서 강제적으로 위안부를 동원하고 군위안소를 운영했다는 공문서와 일본인 전쟁포로 심문보고서, 사진 등 일본의 주장에 반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 중 1938년 3월 당시 육군성 부관이 중국에 주류하고 있는 군대의 참모장 앞으로 보낸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이라는 통첩에는 “앞으로 (위안부)모집 등에 대해서는 파견군에서 통제해 이에 임하는 인물의 선정을 치밀하고 적절하게 한다”며 “(모집을) 실시할 때에는 관계 지방 헌병 및 경찰 당국과 긴밀하게 연계해 사회 문제상 실수가 없도록 해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 문서를 통해 군 ‘위안부’ 모집업자의 선정부터 모집에 이르는 업무를 군이 감독·통제하도록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연회에 참석한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92) 할머니는 “일본은 아직도 돈벌이를 갔다고, 민간인이 한 짓이라고, 자기네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한다”며 “일평생 이렇게 고생하고 너무 억울하다. 한을 풀지 못하고 있는 우리가 돈 받아 뭐 하겠나”라고 한탄했다.

◆10명의 생생한 증언

사례집에는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은 피해자 10명의 생생한 증언도 담겼다. 임신한 채 찍힌 사진으로도 잘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박영심 할머니. 그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스물여섯 살이던 1938년 3월 일본 순사의 손에 강제로 평양을 거쳐 중국 남경으로 끌려갔다.

박씨는 일제가 조선 여성을 위안부로 데려간 악명높은 ‘처녀공출’이었다. 검은 제복에 별을 두 개 달고 긴 칼을 찬 일본 순사는 박씨와 친구를 강제로 평양에 압송했다.

박씨는 생전 “일본군이 하루에 30명 정도 왔다”며 “저항을 하면 다락방으로 끌려가서 발가벗겨진 채 매를 맞아야 했다. 일본 병사를 상대하는 하루하루는 인간의 생활이 아니었다. 하루라도 빨리 도망가고 싶었지만 감시는 엄혹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지옥 같은 그곳에서 3년 넘게 지내다 미얀마 랑군, 라시오 위안소를 거쳐 국경지대인 송산이라는 최전선 지대로 끌려갔다. 박씨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에서 한 사람이 하루 30~40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진 놈들이 술 먹고 달려들어 그때의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위안부 중 4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병 걸려 죽거나 폭격에 맞아 죽었다”고 회고했다.

박씨는 1944년 9월 중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 수비대가 전멸하면서 만삭인 몸으로 포로수용소로 갔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2월 고향 땅인 북한으로 돌아온 그는 위안부 문제를 알리다 2006년 8월 평양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위안부 피해자 김소란(가명) 할머니는 1941년 봄 언니가 “병원에 붕대 같은 것을 씻어주면 한 달에 돈을 얼마큼씩 받는다”는 말에 필리핀 마닐라의 한 시골로 갔다. 사흘 만에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쉰이 넘은 일본인 할아버지는 발길로 차고 말도 못 하게 했다. 김씨는 “사는 게 아니라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흘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고 증언했다.

이날 강연회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작품 전시와 할머니에게 남기는 글 작성 등 다양한 부대행사도 진행됐다. 또 서울시는 참가한 시민들에게 위안부 이야기를 담은 사례집을 제공했다.

▲ 22일 오후 서울시청 본관 대회의실에서 ‘문서와 사진, 증언으로 보는 위안부 이야기’ 강연회가 열린 가운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작품과 사진 자료가 전시돼 시민들이 관람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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