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우 안전사회시민연대 대표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자잘한 대통령 업무를 몸소 하기 싫어서 비슷하게 생긴 대타를 뽑아 대통령 역할을 맡겼는데 그 가짜 대통령이 들통 날 뻔한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기면서 국정을 잘 수행해서 인기가 치솟자 이걸 참지 못한 진짜 대통령이 가짜 대통령을 해고 통보하자마자 가짜가 진짜를 해고 통보한다. 이건 외국영화의 한 장면이다. 최순실의 국정 배후 조종과 농단 사태를 보면서 차라리 영화처럼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상상해 본다. 영화 속에서는 대통령 본인이 가짜를 점찍는 위치에 있었지만 현실 속에서 박대통령은 최순실씨의 정신적 포로 상태였다. 영화 속에서 국민은 더 행복해졌지만 현실 속의 국민들은 허탈감과 자괴감, 배신감에 빠져들고 있다. 박근혜씨는 대통령으로 나서지 않고 그냥 사인으로 살면서 최순실씨와 개인적 관계를 맺고 살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국가로 보나 본인으로 보나 지금보다 100배는 더 나은 선택이다. 

그는 70년대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5년 동안 퍼스트레이디를 대행했다. 하지만 그 귀한 자리를 즐겼을 뿐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는 국정을 익히지 않았다. 철권 독재정치의 문제점을 깨달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최태민이 만든 무슨 단체에 업혀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버지 암살 이후에는 칩거 상태로 세월을 보냈고 1990년대에 정계에 입문하긴 했지만 그가 의정활동을 야무지게 한 경험도 없다. 2012년 기준으로 5선 박근혜 의원이 14년간 대표 발의한 법안이 15건에 불과했고 맨 처음 정치에 입문한 15대 때는 한 건도 없다. 18대 기준으로 의원 1인당 대표 발의한 법안 수가 36개인 점을 볼 때 얼마나 적은 수인지 알 수 있는 수치다. 

그는 신한국당이 차떼기당으로 악명이 높아 해체 위기에 놓였을 때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천막당사 퍼포먼스를 통해 당을 구해내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정 정당 대표 자격으로 세운 공에 불과한 것이고 국정 또는 의정에서 공을 세운 건 아니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보궐 선거에서 야당을 실신시킬 정도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것 역시 나라에 공을 세운 것이 아니다. 정적과 승부를 벌이는 데는 강했지만 공적 업적으로 자신을 증명해 보인 건 거의 없었다. 

70년대 퍼스트레이디 대행 수행 전력과 아버지 후광 효과로 자신의 능력과는 무관하게 대통령 후보에 낙점 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국민 절대 다수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선출된 권력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게 자기마음대로 권력을 넘기고 자신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조종을 받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결과다. 사람들은 ‘최순실이 대통령이고 박근혜는 비서’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최순실은 인수대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업적이나 국정 경험을 통해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오로지 선거에 이기기 위해 후보로 옹립한 세력은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지난 대선 때 주류 언론과 여당, 기득권 세력이 박근혜를 대통령 만들기 위해 모든 걸 바쳤다. 

지난 대선을 뒤돌아보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상당수 사람들, 특히 노인들이 “박근혜 불쌍하잖아… 아버지 잃고 어머니 잃고…” 이러면서 앞뒤 안보고 찍어줬다. 대통령 선출 기준이 후보의 철학과 역량, 국민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후보가 불쌍하다는 이유로 뽑은 결과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다. 

그가 국정을 수행하는 걸 보면 모든 행동이 아버지를 복권시키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를 비판하는 건 용납하지 못했다. 행동은 ‘아버지 따라 하기’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타협할 줄 몰랐다. 모든 걸 마이웨이 방식으로 한다. 선출된 권력인 국회를 무시하는 것도 똑같았다. 언론과 검찰을 장악한 것도 똑같다. 검열하는 것도 똑같다. KBS, MBC는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는 단계까지 가버렸다. 검찰 권력도 시녀로 만들었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인물이나 세력은 싹부터 잘랐다. 집회, 시위의 자유도 봉쇄하기 일쑤였다. 대북 강경 기조도 닮았다. 지금부터 40년 전으로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런데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려고 하다 보니 큰 무리가 따랐고 본인에게도 비수가 되었다.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이 합리적 우파였다면 좋았을 것이다.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 단지 아버지 후광으로 대통령 후보로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국내 정치, 남북 정치 할 것 없이 합리적이고 온건한 논조로 끌고 갈 수 있는 인물을 대통령 후보로 결정했다면 지금 한국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겪지 않아도 되는 갈등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남북 간에도 지금과 같은 너 죽고 나 살기식의 사생결단의 파국도 없었을 것이다. 온건 합리가 지배하는 정치에 비합리의 극치인 ‘비선실세’가 어떻게 발을 붙이겠는가? 

앞으로 공직 선거, 특히 대선의 경우 대통령 자격에 대한 공적 검증 시스템을 정착시켜서 공적인 업적이 있고 합리적인 정신과 온전한 철학을 가진 인물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는 정치가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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