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조길은 화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제왕으로서는 전혀 존중받지 못할 인물이었다. 그에 비해 여진(女眞)의 군주 금태종 완안성(完顔晟)은 아버지 아쿠다(阿骨打)에 못지않은 대단한 식견을 갖추었다. 그는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흠종에게 중혼후(重昏侯)라는 치욕스러운 봉호를 주었다. 휘종은 덕이라고는 혼미함뿐이고 흠종은 더 혼미하다는 조롱이다. 송의 북방을 점령한 승자로서의 기쁨을 마음껏 누린 것이다.

이 혼덕공은 북만주에 있는 오국성(五國城)에서 살았다. 혼덕공이 거기에서도 그림을 즐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온갖 굴욕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휘종과 흠정은 남당(南唐)의 후주 이욱(李煜)이 나라를 잃은 후 겪었던 치욕과 같다. 그들의 선조 조광윤(趙匡胤)이 이욱에게 가했던 것처럼, 조길 부자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 누군가는 조길이 이욱의 후신이라고도 한다. 나는 오히려 완안성이 이욱의 후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에는 이러한 인과응보가 무수히 반복된다.

휘종에 의해 송의 판도는 찢어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양자강이라는 강물이 강력한 북방 민족의 말발굽을 일단 막아 주었다. 조씨는 산동 낭야의 왕(王)씨와 함께 장강의 남쪽에 남송이라는 기반을 간신히 마련했다. 남송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 소흥이다. 소흥의 후덕한 땅이 북성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를 받아주었다.

혼덕공 조길이 오국성을 떠날 때는 이미 나무로 만든 관에 들어 있었다. 무엇이라 말할 수도 없는 신세였다. 죽어서 묵묵히 돌아온 남방은 한 시기에 조씨의 강산이었다. 그의 자손은 능묘 하나도 제대로 마련해주지 않았다. 비루하다고 외면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예술가의 지극히 예민한 감수성을 고려하여 조용히 지내도록 배려했을 수도 있다. 혹시 적에게 끌려간 황제의 체면을 생각했을까? 아무튼 혼덕공은 사람들의 눈에서 사라지는 것이 좋은 신세가 되었다.

송육릉 속에 있는 사람들의 초라한 허영은 가소로울 정도였다. 이들은 장강이라는 경계선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 여진인들에게 해마다 엄청난 재물을 바쳤다. 사자를 파견하여 글을 보낼 때는 자기를 낮추어 ‘질(侄)황제’라고 했다. 금의 황제는 ‘숙(叔)황제’였다. 금이 아저씨, 남송은 조카라는 뜻이니, 부자가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루쉰(魯迅)이 만든 비굴한 중국인 ‘아Q’의 자존심과 같았다.

남송의 황제들은 자신이 사는 잘린 땅에서는 배를 불쑥 내밀고, 휘종과 흠종 두 황제가 사막으로 끌려간 것이 난감했던지 선황은 끌려간 것이 아니라 북방을 순수(巡狩)했다고 큰소리쳤다. 수(狩)는 제왕이 겨울에 영토를 순시하며 사냥하는 것을 가리킨다. 북수(北狩)라는 말은 제법 그럴듯하게 들린다. 글자 그대로 눈을 감고 들으면,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수많은 말을 몰면서 사냥하는 장쾌한 장면이 떠오른다.

송육릉의 주인들은 선대가 남긴 부분적인 유산을 지켰다. 거대했던 제국의 강산은 남쪽만 남았다. 얼마나 더 지탱했을까? 152년이다. 6명의 황제가 그 기간을 채웠다. 남송이 망한 후 도망쳐 다닌 3명의 황제를 포함하면 9명이다. 152년이 너무 길다는 느낌도 든다. 판도가 정비된 시간이라고 하면 참으로 대견하다. 역사는 반드시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역사가 가리키는 곳은 6명의 황제가 묻힌 회계산의 깊은 땅속일 것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완만한 언덕 가운데 있는 하나의 흙무더기이다. 사방을 산이 에워쌌다. 동쪽은 청룡산(靑龍山), 남쪽은 자운산(紫雲山), 서쪽은 오호령(五虎岭), 북쪽은 무련산(霧連山)이 있어서 풍수적 조건을 잘 갖춘 곳이다.

이곳은 본래 육유(陸游)의 선조 육전(陸佃)이 조성한 공덕원(功德院)인 태녕사(泰寧寺)의 옛터이다. 어느 해에 이부시랑 양화(楊華)가 능묘 자리를 잡으라는 명을 받았다. 태녕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일어나 보니 그럭저럭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뜸을 들이다가 조정으로 돌아간 그가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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