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서오릉 홍릉,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능

정성왕후, 최장기 왕비로서 재위
후궁의 두 아들 친자식처럼 돌봐
영조 ‘탕평책’으로 백성들 다스려
​​​​​​​‘허우제’ 준비하나 부부 따로 묻혀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서오릉의 ‘홍릉’은 제21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단릉이다. 원래 영조는 정성왕후의 옆자리에 묻히고자 허우제(무덤의 옆자리를 비워두는 방식)로 했으나 결국은 정순왕후와 함께 원릉에 묻혔다. 영조와 정성왕후는 왕과 왕비의 부부로서 33년이라는 최장기 기록을 세웠다. 정성왕후는 영조의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한몫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탕평책을 펼쳤고 백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으로 나라를 편하게 다스렸다. 정성왕후는 정비임에도 영조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나 어질고 너그러워 후궁이 낳은 두 아들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돌봤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에 중간 역할을 했으나 먼저 세상을 떴다. 죽어서 홍릉의 무덤 옆자리를 비워두고 남편을 기다렸으나 끝내 혼자가 됐다. 267년이 지난 지금도 남편을 기다리고 있을 한 서린 홍릉을 찾아가 본다.

홍릉 봉분이다. 1757(영조 33)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숙종의 명릉(明陵)의 예를 따라,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둔 허우제(虛右制)로 조성했다.  영조가 원릉에 묻히니 그 자리는 아직도 비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홍릉 봉분이다. 1757(영조 33)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숙종의 명릉(明陵)의 예를 따라,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둔 허우제(虛右制)로 조성했다.  영조가 원릉에 묻히니 그 자리는 아직도 비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영조, 아버지에 이어 ‘탕탕평평’에 공들여

영조는 즉위 초부터 탕평책을 시행했다. 탕평(蕩平, 탕탕평평)은 ‘서경’에 나오는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에서 나온 말인데 왕이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공평하게 정치를 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영조는 숙종에 이어 각 당파의 인재를 고르게 등용했다. 아버지 숙종은 붕당의 폐해를 통탄했는데 1693(숙종 24)년 1월 19일 실록은 “아! 국가가 불행하여 동인·서인 나뉘어 1백 년이 되었으나 더욱 심해지니 한탄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폐단을 두고 어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재능을 가진 인재를 등용하여 탕평(蕩平)의 방도를 다하도록 하라”고 했다. 1694년 숙종은 박세채가 지은 ‘붕당에 대한 교서’를 반포했다. 박세채는 숙종 때 좌의정이자 소론의 영수로써 문묘와 종묘에 모두 종사된 6현(이언적, 이황, 이이, 송시열, 김집, 박세채)의 한 사람이었다. 1695년 박세채가 사망했지만 그의 탕평책은 훗날 영조도 채택했다. 조선왕조실록에 ‘탕평’이 477회 나오는데 대부분 숙종(41회)과 영조(343회) 때에 있었다. 1725(영조 1)년 1월 3일 영조가 전교하기를 “붕당의 폐단이 요즘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한편을 모조리 몰아내고 같은 편만 자리에 쓰니 왜 함께 벼슬하지 못하는가? 군신은 부자와 같으니, 자식이 서로 시기 의심해 저쪽은 억제하고 이쪽만 취한다면 부모 마음이 편안하겠는가, 불안하겠는가? 귀양 간 사람들은 다시 살펴보고 조정은 탕평하게 거두어 쓰라”고 했다. 1727(영조 3)년 10월 13일 영조는 박세채의 문집을 간행하게 했다. 대사헌 송인명이 “박세채의 갑술년(1694, 숙종 25) 초에 올린 탕평책이 취용(取用) 하는데 합당하나 문집이 간행되지 않았습니다”고 하니 임금이 마침내 명령을 내린 것이다.

홍릉 봉분이다. 1757(영조 33)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숙종의 명릉(明陵)의 예를 따라,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둔 허우제(虛右制)로 조성했다.  영조가 원릉에 묻히니 그 자리는 아직도 비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홍릉 봉분이다. 1757(영조 33)년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영조는 숙종의 명릉(明陵)의 예를 따라,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둔 허우제(虛右制)로 조성했다.  영조가 원릉에 묻히니 그 자리는 아직도 비어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인물을 영의정과 우의정으로 교대로 임명했다. 영조대의 영의정은 21명 40대가 임명됐다. 즉위년 소론의 이광좌를 시작으로 초기 28년간 소론과 노론이 교대로 맡았다. 영조는 1742(영조 18)년 3월 26일 여러 집사들을 들라 하여 직접 쓴 어필을 유생에게 줘 대사성에게 전하라 했는데 그 아래에 연월을 썼는데, 비석에 새겨 반수교(泮水橋, 지금의 성균관대 입구) 위에 세우라고 명하였으니 오늘날 ‘탕평비’라 부른다. ‘동국세시기’에는 영조가 회의를 하면서 탕평채(청포묵에 여러 가지 채소를 섞어 무친 음식)를 내놓았는데 이는 고른 인재 등용을 상징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1754년 6월 24일 소론의 이종성이 사임한 이후는 홍봉한 중심의 노론이 집권했다. 영조 대에 소론의 영의정은 7명이 초기의 9년 2개월 간 있었는데 이광좌가 3회에 걸쳐 5년 4개월을 지냈으며 나머지 소론의 영의정들은 1년도 못 채우고 교체됐다. 영조 중기와 말기의 42년은 노론의 영의정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노론은 김재로 3회(11년 5월), 홍봉한 4회(6년 1월), 김상복 4회(3개월), 한익모 4회(6월) 등이 여러번 등용됐다. 영조의 종묘배향공신은 김창집(노론), 최규서(소론), 민진원(노론), 조문명(소론), 김재로(노론)의 5명이었는데 역시 노론과 소론이 섞여 있어 영조의 탕평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조 말년에 임오사건, 즉 1762(영조 38)년 사도세자 사망사건을 둘러싼 세자 측(사도세자 장인 홍봉한중심의 시파)과 영조 측(김귀주중심의 벽파)의 대립이 발생했고 남인과 소론이 시파와 벽파로 전환됐다.

홍릉은 조선 제 21대 왕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의 단릉이지만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홍릉은 조선 제 21대 왕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다. 정성왕후의 단릉이지만 쌍릉의 형식으로 조성됐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영조는 탕평책 외에도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여러 폐단을 바로잡는 개혁을 단행했다. 백성에 큰 부담을 주던 군역을 줄이고자 ‘균역법’을 시행하고, 노비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 조치를 취했다. 즉위한 다음해에는 무릎에 판자를 끼고 그 위로 무거운 것으로 눌러 고문하는 압슬형의 참혹함을 목격하고 이를 폐지토록 하고 불에 달군 인두로 피부를 지지는 낙형 또한 금지시켰다. 함부로 죄인을 죽이는 것을 막고자 사형수에게 3복(죄를 3번 심리함)을 시행했다. 식량부족에 배를 곯는 백성을 생각해 사치음주행위를 금지했으며 1733년에는 금주령을 내렸다. 청계천을 건설하고 ‘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 등을 저술했다.

영조 대에는 안정적인 나라운영과 극성을 부리던 기근이 줄어 인구가 증가했다. 현종과 숙종 대에 가혹한 기근과 역병으로 수십만명이 죽어 인구가 줄었는데, 숙종 말년 1720년 전국의 호구조사에서 인구가 680만 808명이었으나 영조 말년 1771년에 701만 6390명으로 늘었다. 가구 수도 156만 가구에서 168만 가구로 증가했다.

홍릉 무석인과 문석인이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여러 장식을 했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 무늬가 있고, 가슴 부분은 구름 모양을 새겼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홍릉 무석인과 문석인이다. 홍릉의 무석인은 투구와 등에 여러 장식을 했다. 갑옷의 등 부분에는 물고기 비늘 무늬가 있고, 가슴 부분은 구름 모양을 새겼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영조의 왕비와 후궁들

숙종이 적장자인 반면 영조가 후궁의 아들이었으나 부자는 후궁에게서 두 아들을 뒀다. 영조는 10살 되던 해 1704년 달성서씨 서종제(사마시합격, 사릉참봉을 지냄)의 12살 된 딸과 결혼했다. 그러나 자식이 없었고 1719년 후궁 정빈 이씨가 아들을 낳으니 정성왕후의 양자로써 세자(효장세자)로 책봉됐으나 9살의 나이로 죽었다. 1721년 경종이 즉위해 이복동생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니 서씨는 왕세제빈에 책봉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1724년 경종이 승하하니 영조가 즉위하고 서씨는 왕비(정성왕후)가 됐다.

정성왕후는 아버지가 벼슬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집안은 원래 고려개국공신 서신일 이후 서희 등 4대에 걸쳐 정1품·종1품의 벼슬만 5명이나 배출된 명문가였다. 정성왕후는 무려 33년 가까이 조선 최장기 왕비의 자리에 있었다. 조선의 20년 이상 장기 재위한 왕비는 7명으로 세종의 소헌왕후 28년, 중종의 문정왕후 27년, 명종의 인순왕후 22년, 선조의 의인왕후 31년, 정조의 효의왕후 24년, 순조의 순원왕후 32년, 고종의 명성왕후 30년이다.

홍릉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은 하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난간석에는 능의 방향(을(乙), 신(辛))이 새겨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홍릉 능침의 봉분은 병풍석은 하지 않고 난간석만 둘렀다. 난간석에는 능의 방향(을(乙), 신(辛))이 새겨져 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1735년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에게서 아들이 태어났으니 정성왕후의 양자로 세자(사도세자)에 책봉됐다. 정성왕후는 훗날 남편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가 갈등에 휩싸였을 때 중간역할을 했다. 1757년 창덕궁에서 65세에 세상을 뜨니 현재의 서오릉 홍릉(弘陵)에 자리했다. 두 달 후 시어머니인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도 승하하니 왕실은 두 왕후의 상을 치러야 했다. 2년 후 정순왕후 김씨(1745~1805)가 왕비에 책봉됐다. 1759(영조 35)년 6월 9일 실록은 “삼간택을 행하여 유학 김한구의 딸을 정하고 대혼을 6월 22일 오시로 잡았다”고 했다. 정순왕후는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이때 영조는 65세 왕비는 14세로 무려 51년의 나이차이가 있었다. 정순왕후는 왕비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다른 사람들은 산이나 물이라고 했으나 “인심이 가장 깊다”고 했다고 한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는 무엇이냐고 하니 ‘보릿고개’라고 답하였다. 왕비가 된 후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고자 몸을 돌아서 달라 하니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꾸짖었다 한다.

비각 안에 세워진 표석의 앞면에는 ‘조선국 정성왕후 홍릉’이라 쓰여져 있다. 뒷면에는 ‘서씨 영종대왕 원비’라고 되어 있는데 영조의 묘호는 원래 영종이었으나 1890(고종 27)년 영조로 바뀌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비각 안에 세워진 표석의 앞면에는 ‘조선국 정성왕후 홍릉’이라 쓰여져 있다. 뒷면에는 ‘서씨 영종대왕 원비’라고 되어 있는데 영조의 묘호는 원래 영종이었으나 1890(고종 27)년 영조로 바뀌었다. (제공: 이의준 왕릉답사가) ⓒ천지일보 2024.03.21.

영조는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를 돈녕 도정(왕실의 인척관리기관의 장)으로 삼아 왕비의 아버지에 대하여 예우했다. 김한구는 그해 12월 금위대장에 3년 후 어영대장에 임명됐다. 1762년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일이 벌어졌다. 1763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는 급제한지 10일도 안 돼 교리·수찬에 뽑혔다. 김한구와 아들 김귀주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다. 1769년 11월 김한구가 죽자 동생 김한기를 불러올려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승진시켰다.

1776(영조 52)년 3월 4일 영조가 경희궁에서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묘호를 영종, 전호를 효명, 능호는 장차 홍릉의 위쪽 빈자리에 봉안코자 홍릉이라 했다. 그러나 4개월 후 효종의 영릉자리가 명당이라 하여 여기에 원릉을 조성했다. 영조가 세상을 뜨고 손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니 정순왕후는 왕대비가 됐으며,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뜨고 11세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수렴청정을 하다 1804(순조 4)년에 이를 거뒀다. 다음 해인 1805(순조 5)년에 창덕궁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순조는 정순왕후의 자리를 영조의 원릉에 쌍릉으로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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