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현배

까마득히 먼 옛날, 어느 나라 임금님이 딸 셋을 데리고 살았다. 임금님은 딸들을 몹시 사랑했다.

임금님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는 일 년에 한 번 큰 장이 섰다. 이날은 그 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물건을 사고팔았다.

장날이 가까워지자 임금님은 세 딸을 불러 말했다.

“며칠 뒤면 우리나라에 큰 장이 선단다. 나도 그날 장에 가려고 하는데,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아라. 무엇이든 사다 주마.”

세 딸은 무엇을 사 달라고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먼저 큰딸이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저는 금빛 찬란한 옷을 입고 싶어요. 황금으로 된 옷을 사다 주세요.”

임금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꼭 사다 주마. 장터에는 여러 나라에서 들여온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이 많으니, 그 중에는 황금으로 된 옷도 있겠지.”

임금님은 둘째 딸을 보았다.

“너는 어떤 물건이 갖고 싶니?”

둘째 딸이 대답했다.

“아바마마, 저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신을 신고 싶어요.”

“알겠다. 아무리 비싸도 꼭 사다 줄 테니 기다려라.”

임금님은 막내딸을 보았다.

“너도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말해 보렴.”

막내딸이 마지막으로 대답했다.

“아바마마, 제가 갖고 싶은 것은 세 가지예요. 말하는 포도와 킬킬대는 사과와 노래하는 복숭아….”

“뭐, 뭐라고?”

임금님은 깜짝 놀랐다.

“말하는 포도와 킬킬대는 사과와 노래하는 복숭아? 그런 물건이 장터에 있을까? 없으면 수소문해서라도 사올 테니 걱정하지 마라.”

임금님은 막내딸을 안심시켰다.

며칠 뒤, 드디어 장날이 돌아왔다. 임금님은 장터에 가려고 마차에 올라탔다.

“아바마마, 저희가 원하는 선물을 꼭 사다 주세요.”

세 딸은 왕궁 문 앞까지 나와 임금님을 배웅했다. 임금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얼른 다녀오마.”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임금님은 마차를 타고 장터로 갔다. 장터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넓은 마당에는 물건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았는데, 물건을 사고파느라 모두 정신이 없었다.

임금님은 먼저 옷을 파는 곳에 가서 물었다

“황금으로 된 옷이 있느냐? 한 벌만 다오.”

다른 나라에서 온 장사꾼이 옷더미에서 옷 한 벌을 끄집어냈다.

“여기 있습니다. 값이 비싸긴 해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옷이지요.”

임금님은 비싼 돈을 주고 금빛 찬란한 옷을 샀다. 큰딸에게 줄 선물이었다.

임금님은 그다음에 신발 파는 곳으로 갔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신을 사고 싶은데….”

임금님의 말에 장사꾼은 신발 한 켤레를 집어 들었다.

“역시 임금님은 다르시군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신발을 사시다니요.”

장사꾼은 신발을 건네주며 감탄했다. 이리하여 둘째 딸에게 줄 선물도 샀다.

임금님은 막내딸에게 줄 선물을 사려고 과일 파는 곳으로 갔다.

“여기서는 포도, 사과, 복숭아를 팔고 있지?”

“그렇습니다. 얼마나 드릴까요?”

장사꾼은 과일을 봉지에 담으려고 했다. 그러자 임금님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평범한 과일 말고 이런 과일 있나? 말하는 포도와 킬킬대는 사과와 노래하는 복숭아….”

“예?”

장사꾼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임금님도 참…. 그런 과일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저는 과일 장사 50년에 말하는 포도, 킬킬대는 사과, 노래하는 복숭아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제발 구해다 주게.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글쎄, 그런 과일은 살 수 없다니까요.”

장사꾼은 단호하게 말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임금님은 실망스러웠다. 막내딸이 원하는 선물을 사지 못했으니까.

“할 수 없지. 그만 왕궁으로 돌아가자.”

임금님은 황금으로 된 옷과 다이아몬드가 박힌 신만 마차에 싣고 왕궁으로 향했다. 왕궁으로 가려면 들길을 지나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마차 바퀴가 진창에 박히고 말았다. 아무리 말들에게 심한 채찍질을 해도 마차는 길 위로 올라서지 못했다.

임금님 일행이 이렇게 낭패를 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큰 돼지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났다. 사람처럼 말하는 돼지였다.

“임금님, 도와드릴까요? 막내 공주님을 제게 준다고 약속하시면 마차를 진창에서 빼 드리지요.”

임금님은 몹시 지쳐 있었다. 빨리 왕궁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으니 마차를 진창에서 빼다오.”

임금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돼지는 씩씩거리며 마차를 코로 밀었다. 힘이 얼마나 센지 마차는 가볍게 길 위로 올라섰다.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온 임금님은 돼지에게 시달려야 했다. 돼지가 뒤따라와서 막내딸을 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이다.

임금님은 시녀 하나를 공주처럼 속여 돼지에게 내주었다. 그랬더니 돼지는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임금님, 왜 저를 속이려 하십니까? 이 사람은 막내 공주님이 아니라 시녀입니다.”

이렇게 되자 임금님은 막내딸을 돼지에게 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약속을 지켜야 했으니까.

돼지는 막내 공주를 데리고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돼지우리로 갔다.

공주는 냄새가 풀풀 나는 그 우리에서 돼지 곁에 누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공주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돼지우리가 아닌, 으리으리한 왕궁에 누워 있었다. 게다가 자기 곁에 있는 것은 돼지가 아니라 잘생긴 젊은이였다.

“깨어나셨군요. 보여 드릴 것이 있는데 같이 가시지요.”

젊은이는 공주를 정원으로 데려갔다. 정원에는 공주가 갖고 싶던 세 그루 과일나무가 있었다. 말하는 포도가 열린 포도나무, 킬킬대는 사과가 열린 사과나무, 그리고 노래하는 복숭아가 열린 복숭아나무였다.

젊은이가 공주에게 말했다.

“저는 이웃 나라의 임금입니다. 못된 마법사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해 버렸지요. 저처럼 이 세 그루 과일나무를 좋아하는 아가씨를 만나야 마법이 풀리는데, 운 좋게도 당신을 만났습니다.”

말하는 포도와 킬킬대는 사과와 노래하는 복숭아를 좋아하는 공주는 이웃 나라의 임금님과 결혼해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신화 이야기 해설>

이 이야기에서 임금님은 너무 쉽게 돼지와 약속했다. 마차를 진창에서 빼주면 막내 공주를 돼지에게 주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님처럼 쉽게 약속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꼭 약속을 지킬 것도 아니면서 성급하게 약속부터 한다는 것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약속을 해도 그것이 인사치레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따지고 들면 오히려 깜짝 놀란다. ‘내 뜻이 잘못 전해졌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돼지가 막내딸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임금님에게 성화를 부렸으니, 임금님이 오히려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돼지는 참 당차고 정열적이다. 임금님과의 말싸움에서도 지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 임금님을 항복시킨다. 돼지가 보여 준 그런 기질도 헝가리 사람들이 갖고 있다. 헝가리는 옛날에 로마 제국에 속해 있어 라틴 민족의 기질을 지니고 있다. 아주 정열적이고 흥분도 잘한다. 자기 주장이 강해 토론을 즐기고 말싸움을 하면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한다.

임금님과 돼지가 함께 나오는 장면은 문득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제물로 바쳐진 돼지가 달아나자, 고구려 유리왕은 신하를 시켜 돼지를 잡아오게 한다. 이때 돼지는 국내성 위례암까지 달아나고, 신하는 그곳이 좋은 땅임을 알고 유리왕에게 보고하여 결국 수도를 옮기게 된다.

그 이야기에도 나타나 있듯이, 삼국 시대에는 돼지를 신의 뜻을 전하는 신성한 존재로 여겼다. 지금의 도읍이 좋지 않아 더 좋은 도읍으로 옮기게 하려고 돼지를 달아나게 했으니까. 또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돼지가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어 돼지꿈을 꾸어도 아주 좋아했다. 많은 재물을 얻게 될 거라면서 말이다. 그래서 요즘도 돼지꿈을 꾸면 복권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돼지가 더럽고 탐욕스럽고 게으른 동물이라면서 기피했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이웃 나라의 임금님은 못된 마법사의 마법에 걸려 돼지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가장 귀한 존재인 임금님이 가장 천한 동물로 전락한 것이다.

헝가리 민족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한 것은 10세기부터다. 그 이전에는 민간 신앙을 믿었다. 하지만 그 민간 신앙은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전해 내려왔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딸또시’라는 착한 마법사에 대한 믿음이다. 딸또시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고, 가뭄이 들면 비를 내리게 하며 야생 동물이나 가축들을 제 맘대로 부릴 수 있다. 그리고 용이나 뱀을 타고 다른 마법사들과 싸울 수도 있다.

딸또시는 태어날 때부터 보통 사람들과 달랐다. 이가 나 있거나 손가락이나 발가락이 열 개가 넘게 달려 있다. 그리고 이 아기가 자라서 일곱 살 또는 열네 살이 되면 동물로 변신하여 늙은 마법사와 싸우게 된다. 딸또시는 주로 우유를 먹고 사는데, 우유를 얻으러 다닐 때 이를 거부하는 집이나 마을에는 폭풍우로 벌을 내린다고 한다. 

헝가리 사람들은 딸또시와 함께 ‘방랑 마법사’가 있다고 믿었다. 방랑 마법사는 딸또시처럼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동굴 속에서 13년 동안 악마에게 배워서 얻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주문서를 지니고 다니고 요술 반지를 끼고 있다.

이번 이야기에서 돼지우리가 으리으리한 궁전으로 바뀌고, 돼지가 잘생긴 임금님으로 돌아오는 대목이 아주 흥미롭다. 헝가리 민족에게는 오래전부터 믿어 온 민간 신앙이 있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은 육신과 영혼이 있는데, 잠이 들면 영혼이 육신을 빠져 나와 개구리, 뱀, 쥐, 나비 등 여러 동물로 변신해 마구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혼을 ‘자유로운 영혼’ 또는 ‘그림자 영혼’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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