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소생으로서 상생과 화합 위해 노력해야

종교(宗敎, religion)란 무엇인가. 종교의 형성과정과 본질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은 지식인들의 오랜 화두(話頭)이다.

많은 이들은 이생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종교를 택하고, 그 안에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누리는가 하면, 더 나아가 내세의 안녕을 염원하기도 한다.

전 인류가 나름대로의 신(神)을 믿는다고 가정하면, 지구촌의 모든 인류를 종교인 또는 신앙인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믿는 ‘종교’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 세대를 위한 종교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 것인지 살펴보자.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宗敎)의 사전적 의미는 ‘무한(無限)·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앙하여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이다. 즉, 인간의 정신문화 양식의 하나로 인간의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하여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원리와 연결해 의미를 부여하고, 또 그 힘을 빌려 통상의 방법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인간의 불안·죽음의 문제, 심각한 고민 등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종교의 기원은 오래됐으며, 그동안 많은 질적 변천을 거쳐 왔으나 오늘날에도 인간의 내적 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종교’라는 것을 사전적 의미를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설명 불가능한 일, 눈으로 보이지 않는 초월적 존재를 향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을 ‘종교’라는 단어로는 형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범민족화합통일본부 총재이자 원구단천제복원을 위해 만방으로 뛰고 있는 박영록 전 신민당 최고위원을 비롯한 종교계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를 ‘으뜸가는 가르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종교를 어원에 따라 정의하면 다음과 같다. 라틴어 렐리기오(relegio)가 영어권에서는 렐레게레(다시 읽는다) 즉, 신에 관한 이야기를 반복하여 읽는 데서 종교라는 말이 생겼다고 해석하고 있다. 또한 렐리가레(다시 묶는다)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죄로 인해 단절되었다가 종교로 말미암아 이어졌다는 데서 종교라는 말이 생겼다고 보고 있다.

마지막 해석으로는 ‘레엘리게레(reeligere, 다시 뽑는다)’라는 어원으로 하나님이 원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했지만, 그 선민이 제 구실을 못해서 다시 교회를 선택했다는 것에서 종교라는 말이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자어권에서는 종교의 기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마루+가르침’ 즉, 최상의 가르침 또는 으뜸가는 가르침, 진리를 파악한 최상의 경지 등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의 현실

종교의 정의를 볼 때에 각 종교가 믿는 대상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는 같음을 알 수 있다. 각 경전이 요구하는 것 또한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으로 인간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삶과 자격을 요구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모든 인간이 동등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 서로 화해하고 상생하기를 바라고 있다. 세상 어느 종교의 경서에도 서로 비판하고 저주하며, 갈라지고 반목하라는 말은 없다.

그러나 작금의 종교세계는 어떠한가.

서로의 종교를 피력하는가 하면, 자신과 믿는 대상이 다르면 공존이라는 것 자체가 어려운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특히 요즘 불거지고 있는 ‘종교편향’의 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종교세계가 진정 이래서야 되겠느냐는 체념마저 든다.

얼마 전 종교지도자 초청 청와대 오찬에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이 불참한 사건 또한 현 사회의 종교간 갈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종교간 갈등과 불신을 조장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개신교의 배타성을 꼽는 이들이 많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유일신을 강조하다보니 타종교와 공존하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각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류의 전쟁이 모두 종교 때문에 일어난 ‘종교전쟁’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이러한 이유 중의 하나다.

 
화합과 상생 어려운가

각 종교간 불신과 반목을 해결하고, 사회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나누자는 의미의 대표적인 행사가 바로 ‘오체투지’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난 3월28일 이들 순례단의 행렬이 시작됐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와 전종훈 신부, 불교환경연대 상임대표 수경 스님 등이 이끄는 ‘오체투지(五體投地)’ 순례단의 행렬은 ‘어떤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자기중심의 성찰과 자성을 통해 우리 스스로 변하면서 현실에 닥친 문제와 지금의 시국을 헤쳐 나가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그러나 이 순례단의 행렬에서도 개신교 목사는 찾을 수 없었다.

하나 되고자 하는 모임에 개신교 목회자들의 참여율이 낮은 것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각 종단이 모여 ‘하나 되자’고 외치지만 실상 이름만 내걸었지 진정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하거나 실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개신교 내부에서 자행되는 강제개종교육이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산하 기관단체 중 하나인 이단사이비대책위원회에 소속되어 있던 한 목사에 의해 자행된 강제개종교육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세상법으로도 심판받은 이 목사의 행위는 인·도덕적으로 볼 때에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밖에서 감리교 내부 감독회장 사태를 바라보고 있는 것 또한 불편하기 짝이 없는 행동으로 사랑을 강조하고, 희생을 강조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유하시도다(롬 10:12)”

이 말씀을 믿고 마음에 새긴 목회자라면 서로 종교가 다르다고 외면하거나 반목하지는 않을 것이다. 박남수 한국종교연합(URI Korea) 상임대표는 “종교간의 편향 문제는 각 종단간의 세력 확장과 관련한 득실 차이 등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생겨나는 것 같다”며 “이를 위해 연합적인 대화와 이웃종교를 이해하는 시각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각 종단이 연합종교 사업을 펼쳐나가도록 투자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URI에서는 종교평화지수를 측정하고 발표해 종교갈등의 위험수위를 알려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임을 인식시켜 나갈 것”이라며 종교간 갈등을 와해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임을 알리기도 했다.

 

각 경전, 무엇을 말하나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활동했던 공자는 ‘우주의 통치자가 강세해 간방에서 모든 말씀의 꿈을 이루실 것(성언호간: 成言乎艮)’을 전했다. 이는 동북 간방은 만물의 끝남과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말씀이 간방에서 이루어진다는 말로 풀이된다.

조선 명종 때의 철인으로 알려진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1509∼1571)가 전해 받았다는 비술(秘術)을 비롯해 동양선지자들은 ‘천택지인(天擇之人)이 삼풍지곡(三豊之穀)을 가지고 오는데 그것은 화우로(火雨露)다.

즉,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요 영생의 양식을 뜻한다(렘 5:14, 렘 23:29, 신 32:2). 그것은 태고이후 초락도(初樂道)다. 그 십자가의 도로 싸워 이기니(계 12:11) 거기가 십승지(十勝地)다. 그 곳엔 일만이천(一萬二千) 도통군자(道通君子)가 있음’을 말해 왔다.

즉, 하늘의 도를 통달해 치리하는 나라와 제사장들이 있는 곳이며, 교회시대에서 제사장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이들 모두가 듣고 본 것은 있으나 그 실체를 알지 못했고, 그 예언을 풀지 못했다.

때가 이르러 살펴보니 이 예언은 성경으로야 풀어지는 것으로 모든 도(道)는 십자가 도(道)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석가 또한 다라니경 38:8에 ‘하시야소래 오도무유지등야(何時耶蘇來 吾道無油之燈也)’라 말했다. 이는 ‘언제든 야소가 오시면 나의 설파하는 도리는 기름 없는 등과 같으니라’는 뜻으로 참 진리를 전하는 자가 올 것을 예언했다.

예수를 한자로는 야소(耶蘇)라고 하고, 오도(吾道)라는 것은 자기가 진리라고 가르친 이치를 말한다면, 불교의 개조(開祖)인 석가모니는 기원전 약 486년 전에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그 이름은 하나님이시니 너희는 그에게로 돌아가라(其名曰 天主也 汝歸衣, 화엄경)”고 설법한 바 있다. 이를 두고 김동길 박사는 “만일 석가나 공자가 그리스도 이후에 태어났더라면 그리스도를 믿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종교는 신이 만든 것

이렇듯 각 종교의 경서는 궁극적으로 한 사람을 말하고 있다. 각 경서에서 말하는 신(神)은 그 당시 생로병사의 비밀을 알고 싶었던 석가나, 공자에게 장래에 이루어질 일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알려줬다. 그리고 그 실체를 찾기 위해 기록한 것이 바로 경전이다.

즉, 모든 종교의 종착점은 같지만 그 과정이 다를 뿐이다. 각 경전이 지목한 바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루겠다고 한 그 말씀을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믿기 때문에 종교간 갈등과 반목이 더욱 날개를 치는 것이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가는 방법이 꼭 기차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버스로 가도 되고, 자가용으로 가도 된다. 그런데 기차를 타고 가지 않았다고 그 사람을 핍박하고 배척한다면 말이 되겠는가. 다만 그 가는 길이 좀 더 편하고 쉬운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알려주고, 동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옳은 일일 것이다.

이처럼 각 종교도 같은 이치다.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같고, 그 귀착점이 같다면 서로 배척할 것이 아니라 함께 갈 수 있도록 협력하고 상생해야 할 것이다. 그 길로 가는 가장 쉬운 길이 있다면 그것을 깨우쳐주는 것도 바로 종교인들의 몫이다.

성경에 말씀을 받은 자는 신(神)이라는 말씀이 있다(요 10:35). 각 종교에 경전이 있고, 그 경전에 기록된 말씀을 깨달아 아는 자라면 신의 소생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의 소생이라면 결코 핍박과 저주를 일삼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를 위해 기도하고, 세계가 하나 되어 공존하여 화합과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종교지도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를 믿는 모든 종교인들의 몫이자 의무임을 잊지 말고 사회 곳곳에서 신의 소생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만든 신의 바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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