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계종 백년대계본부 불교사회연구소’가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템플스테이통합정보센터 3층 문수실에서 ‘불교계의 3.1운동과 항일운동(2)’ 학술세미나를 연 가운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경순 박사가 발표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3.1운동 100주년 기념

[천지일보=이지솔 기자] ‘조계종 백년대계본부 불교사회연구소(불교사회연구소)’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불교계의 3·1운동 전후의 활동과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을 재조명했다.

불교사회연구소는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템플스테이통합정보센터 3층 문수실에서 ‘불교계의 3.1운동과 항일운동(2)’ 학술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는 ‘불교계 3.1운동의 새로운 조명’을 주제로 진행됐다.

먼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경순 박사는 ‘불교청년의 탄생 : 1910년대 불교청년의 성장과 담론의 형성’을 주제로 발표했다.

1910년대는 조선총독부가 사찰령과 시행규칙을 통해 불교계를 지배하던 시절로 그동안 불교계에서는 3.1운동의 연구에서 한용운과 백용성 등의 인물만을 주목했다. 또한 중앙학림 학생들만 언급했었다.

이에 대해 이 박사는 “이제까지는 특정인물에 치우쳐왔다”며 “그러나 3.1운동을 실행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사찰 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수많은 불교청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꼬집었다. 이어 “근대사회에서 청년들뿐 아니라 불교계 역시 근대 교육제도를 형성한 가운데 새로운 세대의식을 지닌 불교청년이 성장했다”며 “이들은 확대된 교육의 기회 속에서 보통학문의 세례를 입고 성장한 첫 세대집단이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 당시 독립운동가 겸 승려였던 한용운의 저서 ‘유심’에 대해 “한용운이 청년수양론을 펼치면서 당시 수양론의 주제를 불교적 맥락에서 재해석 했다”며 “이에 불교청년들은 시대의 각성한 주역으로 불교계를 이끌 새로운 세대로서 이후 3.1운동에서 다수의 실행주체가 됐다”고 말했다.

▲ ‘조계종 백년대계본부 불교사회연구소’가 1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템플스테이통합정보센터 3층 문수실에서 ‘불교계의 3.1운동과 항일운동(2)’ 학술세미나를 열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구한말부터 사찰령 전까지 불교계의 항일 운동에 대해서는 진각대학원 김경집 교수가 발표했다.

김 교수는 “1876년 한국과 조약을 체결한 일제는 침략의 의도를 감추기 위해 일본 불교를 이용했다”며 “한국사회에 침투한 일본 불교는 반감을 없애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1904년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과 1907년 정미7조약으로 차관정치를 단행했으며, 일제의 침략 의도가 표면화되자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했다.

이에 김 교수는 “이 당시 불교계도 정미의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많은 인원이 일제에 체포돼 고문을 받았고, 많은 사찰이 격전지가 돼 전소되는 비운을 겪었다”며 “이 대목에서 적극적으로 불교계가 항일운동에 동참했음을 알려준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저항하는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불교계에서는 47개 사찰과 1184명이 참여했다.

이외에도 세미나에서는 일제에 항거한 원종스님으로 알려진 백범 김구의 출가와 수행, 불교 정신 등에 대해 동국대 불교학술원 한상길 교수가 연설했다. 또 현 조계종립 동국대학교의 전신으로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중앙학림에 대해서는 동국대 김광식 특임교수가 발표했다.

이번 세미나는 불교사회연구소의 3·1운동백주년기념 학술사업의 목적으로 지난 6월 ‘3·1운동의 발발 배경과 개요’를 주제로 한 1차 세미나에 이어 두 번째로 마련됐다.

한편 불교계뿐 아니라 기독교와 민속종교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서 전쟁 위기로 치닫는 한반도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3.1운동 정신을 잇는 기자회견 및 선언식 등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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