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에 맞서 임진강을 사수한 영국군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를 상징하는 베레모. ⓒ천지일보(뉴스천지)

설마리 추모공원

중공군 4월 대공세 막은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최후까지 항전
대원 652명 중 생존자는 67명
적 진격 막아 서울 침공 저지

[천지일보=임문식 기자] 1951년 4월. 봄기운 완연한 날씨 속에 잔잔하게 흐르는 임진강.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이 나타나자 순식간에 총성과 포탄소리 빗발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했다. 중공군 3개 사단과 맞닥뜨린 푸른 눈의 전사들은 사흘 밤낮 총격전을 벌이며 고지를 사수했다. 적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도 마지막 한 발까지 쏟아 부으며 저항했다. 이들이 10배가 넘는 적의 공세를 저지하는 동안 한국군과 유엔군은 방어선을 재구축하는 시간을 벌어 수도 서울을 사수할 수 있었다.

이역만리 먼 땅에서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영국군 제29여단의 이야기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에 있는 영국군 설마리 전투 추모공원은 제29여단 글로스터 대대와 제170경 박격포대의 소대장병 등 영국군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4년 4월 23일 조성됐다.

설마리 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글로스터 대대 등 영국군 제29여단이 중공군의 대공세에 맞서 임진강을 사수한 전투다. 이 전투로 아군 주력부대가 철수하도록 시간을 벌어 서울을 방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뜨거운 여름날 찾은 추모공원에선 높이 솟은 3개의 국기가 힘차게 펄럭이며 방문자들을 맞이했다. 태극기와 영국기, 그리고 유엔기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에 속했던 영국군이 한국군과 함께 피를 흘리며 싸웠음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설마리는 동쪽으로 감악산, 서쪽으로 파평산이 둘러싸고 있어 의정부를 경유해 서울로 진출할 수 있는 주요 길목이다. 서울 공격과 방어의 요충지였던 만큼 과거에도 이곳을 둘러싼 전투가 항상 치열하게 벌어졌다.

▲ 임진강 전투에서 중공군에 밀려 설마리 지역으로 퇴각해 들어오는 영국군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공원 입구에서 ‘평화의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추모조형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6.25참전 당시 영국군이 썼던 베레모를 형상화한 것이다. 뒤로는 ‘당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이 적힌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 앞엔 누군가 놓고 간 빨간 색 생화가 놓였다. 양 옆에 세워진 추모벽엔 설마리 임진강 전투 당시 전사한 영국군인들의 이름들이 기록 사진과 함께 표시돼, 6.25 전쟁 당시의 참혹했던 순간을 되새기고 있다.

푸른 잔디 마당에 설치된 영국군 동상 6개는 임진강 전투에서 중공군에 밀려 설마리 지역으로 퇴각해 들어오는 순간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베레모를 쓴 채 총을 들고 들어오는 이들의 얼굴에선 압도적인 숫자의 적과 맞닥뜨린 공포감과 마지막까지 결사 항전하겠다는 비장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추모조형물 오른쪽엔 설마리 전투비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있다. 글로스터교란 이름이 붙여진 이 다리는 설마천을 가로지른다. 다리를 건너면 칸 중령 십자가가 보인다. 제임스 칸 중령은 임진강 전투 당시 글로스터 연대 1대대를 이끌었던 지휘관이다. 십자가는 그가 포로생활 중에 만든 것으로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 포로수용소에서 예배 때 사용됐다.

설마리 전투비는 1951년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임진강과 설마리에서 벌어졌던 영국군과 중공군의 치열했던 전투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전투비 앞에 설치된 설마리 전투약사에 따르면 1951년 봄 중공군 제63군의 3개 사단은 서울로 향하는 적성·연천지구 침공로에 대공격을 감행했다. 적군의 진격로에는 영국군 제29여단이 임진강이 굽어보이는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다.

1951년 4월 22일은 따뜻한 봄날씨였는데, 이날 임진강 격전이 시작됐다. 전투 첫날밤 글로스터 대대는 10배에 달하는 적군에 대항해 용전했다. 그러나 다음 2일간의 혈전 끝에 지금의 전투비가 있는 설마리 계곡까지 후퇴했다.

▲ 파주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영국군전적비) ⓒ천지일보(뉴스천지)

4월 24일까지의 격전에서 생존자들은 이 기념비 위에 솟아 있는 235고지에 집결했으나, 4만 2000여명에 달하는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탄약은 거의 소모되고 피로와 허기에 지친 상태에서도 대대는 그날 밤 적의 연속적인 공격을 물리치고 고지를 사수했다. 다음날 아침 적의 포위망을 마지막으로 공파하기 위한 공격을 감행하기까지 진지를 고수했다.

글로스터 대대장인 칸 중령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철수하든가 중공군에 투항하든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여단장으로부터 위임받았다. 그는 끝까지 싸우는 길을 택했다. 마지막까지 전투를 치른 글로스터 대대는 652명 중 생존자가 67명에 불과했다. 포로가 된 526명 중 34명이 3년간의 포로수용소 생활 중에 사망했다.

3일간에 걸친 이들의 격전은 당시 중공군의 진격을 상당 기간 지연시키고, 유엔군의 재편성에 소요되는 시간적 여유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중공군의 서울 침공을 저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설마리 전투비의 공식 명칭은 ‘파주 영국군 설마리 전투비’다. 영국군전적비라고도 한다. 전투가 조성된 곳은 과거 금을 채굴하던 금광으로 설마리 전투 당시 최후의 항전을 벌이면서 영국군 희생자들을 임시로 안치했던 장소다. 1957년 6월 29일 영국군과 한국군 보병 제25사단은 동굴 주변의 돌을 채석해 입구에 쌓아올리고, 상하 각각 2개씩 총 4개의 비(碑)를 부착한 형태로 전투비를 건립했다. 위쪽에 있는 2개의 비 중 왼쪽엔 유엔기, 오른쪽엔 희생된 영국군 부대 표지가 새겨졌다. 아래쪽의 왼쪽 비에는 한글, 오른쪽 비에는 영문으로 설마리 전투 상황이 기록됐다. 유엔군 참전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서 2008년 등록문화재 제407호로 지정됐다.

1999년 4월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한 일정 중에 이곳을 방문해 헌화했다. 영국군 참전용사들도 매년 이곳을 방문해 추모행사를 갖고 있다.

한편 한국전쟁에 참전한 영국군 병력은 총 5만 6700명으로 육군은 5개 보병 대대, 2개 야포 연대, 1개 기갑 연대 등으로 구성된 27여단과 29여단이 참여했다. 해군에선 극동함대 소속인 군함 33척, 지원함 25척, 공군에선 1개 수송기 중대가 참전했다. 해병 1개 중대도 참여해 기습작전과 특수작전 임무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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