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권 논설위원

 

“경기 사정이 IMF 이후 가장 어렵습니다. 도대체 회복될 기미가 없어요.”

간밤에 택시기사에게서 들은 얘기다. 피부로 느낀 체감경기를 전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말이 맞다는 단호한 목소리였지만 추측 내지 ‘감(感)’이라고 해야겠다. 택시를 이용하는 손님들로부터 들은 얘기, 개인택시 하루 수입, 동료 기사들이 전하는 말 등을 종합했을 것이다. 그런데 통계숫자도 이를 뒷받침한다.

통계청 월별 고용동향이 있다. 이는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바탕으로 한 고용지표로 현재 일자리 사정을 대변한다. 8월 기준 15~29세 청년실업률이 9.4%로 1999년 이후 가장 나쁜 상황으로 집계됐다. 2015년 8.0%, 지난해 9.3%와 비교된다. 역대 8월 기준 청년실업률이 가장 높은 해는 10.7%였던 1999년이고 2위가 올해다. IMF 이후 18년 만에 가장 최악의 경제라는 택시기사 지적이 맞는 셈이다. 전체 취업자 수 증가 폭(21만 2000명)도 7개월 만에 다시 20만명대로 주저앉았다. 지난해 8월 전체 취업자 증가 폭이 38만 7000명이었으니 고용지표가 후퇴한 것은 사실이다.

‘청년 맞춤형 일자리 대책’ 등을 내세운 박근혜 정부에 이어 문재인 정부도 일자리위원회를 중심으로 애쓰고 있지만 정책 실효성이 별로였다는 게 드러났다. 장기화한 취업난에 정규직을 포기하고 두세군데씩 ‘알바’ 뛰는 청년들을 주위에서 어렵지 않게 본다. 많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체들은 경영난과 최저임금 인상 등으로 폐업 여부를 고민하고 있다. 우리 경제에 회자되는 ‘10년 주기 위기설’도 있어 걱정스럽다.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감안하면 지금도 곧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아 정신 바짝 차려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대외여건의 불안정을 감안해 미리미리 대책을 마련하자. 재정 빚을 줄여 ‘작은 정부’로 가며 외환보유액을 착실히 쌓고 미국의 통상압력, 금리 변동 등에 대한 대응책을 준비해야 한다. 국민은 씀씀이를 줄여 가계부채를 탕감하는 게 필요하다. 기업들도 보다 부가가치가 큰 첨단 미래산업으로 옮겨 타면서 산업구조 리모델링을 서둘러야 한다.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안보위기와 경제위기가 합쳐 뭉뚱그려지면 민초들의 삶은 더욱 힘들 수밖에. 북핵·미사일로 촉발된 외교·안보 위기가 경제위기를 짓누른다. 우리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한반도 주변 외교적 격랑이 거세어졌다. 미·중의 ‘북한 빅딜’ 시나리오까지 나오고 있다. 미·중수교협상과 미·북베트남 파리평화협정의 주역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트럼프 대통령이 만나 조언을 구했다. 김정은 정권과 주한미군 철수를 맞바꾸자는 키신저 솔루션은 실제 현실화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민을 잔뜩 긴장하게 한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고도 한·미동맹이 굳건히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의 영향력이 더 커지면 한반도는 어떻게 되나 하는 의문이 든다. 1923년생 노익장 지략가인 키신저가 제안한 빅딜설은 미국의 동북아 최전방 방어선을 현해탄 건너 일본까지 후퇴시킨다. 북핵해법도 해법이지만 미국이 과연 한반도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해온 전략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을지는 이해가 잘 안 된다. 다만 우리 모르는 사이에 국제사회에 큰 지각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 제3차 대전이라는 인류의 재앙을 불러올 ‘제2의 6.25’는 막아야 할 터. 비극적인 한국전쟁의 참화를 예방할 수 있다는 점, 키신저식 친중정부수립책략에 중국이 솔깃해 할 수도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이런 가운데 내달 5일부터 아시아 순방에 나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비상한 관심사다.

만일 미국이 군사적 옵션을 포함한 대북강경조치를 실제로 고려하고 있다면 순방이 마지막 결단을 앞둔 명분쌓기가 된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의 중재노력, 중국 공산당 당대회와 시진핑 집권2기 출범, 평창동계올림픽 북한 참가 변수 등이 있어 반전 계기가 마련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공자님 말씀 같지만 모든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하고, 외교적 노력을 다각도로, 전방위로 펼쳐야 한다. 핵전쟁 방지는 물론, 경제 위기국면에 돌파구를 찾고 미국과의 통상전쟁을 이겨내기 위해서도 말이다. 무엇보다도 남북관계가 복원돼야 한다. 주변 강국들의 빅딜을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필자가 목적지에 도착해 차에서 내릴 때였다. 택시기사가 더욱 공감 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전쟁이니 빅딜이니 하는 와중에 속수무책으로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한민족 한 핏줄인 남북이 더 늦기 전에 대화를 갖고 무슨 해법을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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