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술 장면 그림 (제공:㈔허임기념사업회)ⓒ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허임 선생은 조선 제일의 침구사였습니다.”

침구사는 침과 뜸으로 병을 고치는 사람이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명불허전’의 주인공이 바로 허임이다.

손중양 ㈔허임기념사업회 대표는 “침구술은 민간에서 퍼져서 전승돼 왔다”라며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고, 전문적으로 발전하면서 직접적 전승이나 서적을 통해 민간의 생활 속에 다시 스며드는 경향도 나타났다”고 말했다. 특히 조선시대 침구사 중 실력이 월등한 인물이 허임 선생이며, 역사 기록을 통해 우리 전통의 침구술의 사료적 가치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원 집서 일하며 의술 눈 떠

허임의 아버지는 허억봉이다. 관노인 허억봉은 어린 시절 한양의 장악원 악공을 했고, 대금실력이 좋아 나라 행사는 물론 사대부가의 연회에도 불려 다녔다. 그러다 예조판서댁의 여종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장악원 근처 민가에서 허임이 태어났다.

어느 날 허임의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병이 나서 어느 의원에게 치료를 부탁했다. 진료비는 허임이 의원 집에서 잡일을 해 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린 나이의 허임은 그 의원 집에서 일해 주며 침구법 등 의술을 익혔다. 손 대표는 “장악원 주변 악공이나 가족, 친지를 대상으로 진료하면서 임상경험을 쌓았을 것”이라며 “의술에 대한 깊이는 더해 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손중양 ㈔허임기념사업회 대표가 허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서적을 들고 미소짓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대 초반 광해군 종군의사

1592년(선조25) 임진왜란 반발 후, 1593년(선조26) 8월 광해군은 평안도를 순회하다가 황해도로 들어갔고 해주에 머물게 됐다. 같은 해 9월 3일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광해군은 “목에 담종과 여러 증세가 다시 발작해서 쑤시고 아프다”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전라의 현장을 누비던 광해군은 심신이 극도로 고달팠을 것이다.

허임이 광해군을 수행하며 침 치료한 것은 이 무렵이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같은 해 11월 허임은 해주에서 광해군의 침치료에 참여했다. 광해군은 10월 25일에도 침을 맞았다. 광해군의 인후증은 적어도 8월에 시작돼 11월 허임에게 침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허임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다.

허임이 1595년 ‘치종교수’로 불린 것으로 보면, 그는 처음에는 종기 치료를 전문으로 했던 ‘치종의’였다. 조선시대에는 종기 등 다양한 외상을 치료할 수 있는 치종전문의사를 국가 의료기관에 배치했는데, 이들을 치종의라고 불렀다. 치종의는 전의감과 혜민서에 소속돼 있었고, 그 중 한명은 치종교수직을 맡았다. 허임이 바로 치종교수인 것이었다.

손 대표는 “전쟁이 일어나면 외과적인 게 많이 필요하다. 허임도 전쟁터에서 관군과 민간인 부상자를 수도 없이 치료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허임은 고름을 짜내고 피를 닦고 꿰매는 오늘날의 외과 의사였다”며 “전쟁 시 약재 없이도 치료할 수 있는 침구술은 대단히 유효한 치료수단이 됐다”고 설명했다.

▲ 충남 공주에 세워진 침구경험방 집필지 기념비 (제공:㈔허임기념사업회) ⓒ천지일보(뉴스천지)

◆허준도 인정한 허임

1604년(선조37) 선조실록에 따르면, 50세던 선조는 심한 편두통을 앓는다. 당시 수의였던 허준은 “소신은 침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라며 왕이 허임에게 침을 맞을 것을 권했다.

그 당시 60대던 허준은 ‘경맥을 이끌어 낸 뒤 아시혈(阿是穴: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 내에서 눌렀을 때 더욱 민감하게 느껴지는 지점)에 침을 놓을 수 있다’는 젊은 허임(당시 30대)의 이야기에 귀를 열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선조는 종종 침을 맞게 된다.

허임은 선조, 광해군, 인조 때까지 임금을 치료했는데 50대쯤에는 요즘 말로 귀촌을 했다. 허임이 공주에 살았지만, 그의 침구진료 소식은 서울의 내의원 제조들도 알고 있을 정도로 주목받았다.

1641년(인조19) 승정원일기에 보면, 공주에 사는 최우량이 허임에게서 침을 배웠는데 그 의술이 매우 뛰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침구경험방(소장:규장각 도서)

◆중국, 일본에 전파된 ‘침구경험방’

허임은 임진왜란 때 인연 쌓은 충청남도 공주로 귀촌해서 유학(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을 가르치고 많은 사람을 치료했고, 70대쯤에는 당시의 임상경험을 모아서 ‘침구경험방’을 펴냈다. 침구경험방은 조선에서 목판활자로 수차례 찍어냈다.

손 대표는 “일본은 ‘침구명감’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고 중국은 허임 이름이 아닌 자국의 유명 명의 이름으로 책을 펴내 오늘날까지도 출판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허준의 동의보감 침구편은 기존의 침구 관련 자료를 정리한 것이지만, 침구경험방은 허임이 터득한 모든 경험이 담겨 있다. 처방까지 담긴 것을 정리한 조선시대 최초의 침구책”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 정부가 침구경험방을 국가지정문화재로 등재할 수 있도록 관심 가져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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