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진남 샛골나이(국가무형문화재 제28호, 전남 나주시 다시면)가 본지 기자에게 베 짜는 모습을 시연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내가 세상을 떠나면 누가 이 일을 계속할지 그게 젤 걱정이여”

[천지일보 나주=이진욱 기자] “아휴~ 말도 말어. 울기도 많이도 울었제. 베가 곱게 안 나오면 잠도 오지 않고 눈물밖에 안 나와. 그 심정은 아무도 모른당께.”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전통 문화재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물리적인 힘으로 막을 수 없는 게 바로 인간문화재 소실이다. 지난 22일 제3회 마한문화축제를 맞아 고(故) 노진남 샛골나이(샛골 직녀)의 베 짜기 시연을 그리워하는 시민이 많다. 하지만 이제는 그를 볼 수 없다.

지난 10일 새벽 6시 30분 국가무형문화재 제28호 나주의 샛골나이 노진남씨가 향년 81세로 별세했다. 앞서 기자는 지난 7월 노진남 선생의 지병 소식을 듣고 허북구 한국천연염색박물관 국장의 안내를 따라서 전남 나주시 다시면 샛골을 방문했다. 그날이 노진남 샛골나이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였던 셈이다.

노진남 샛골나이는 우리나라 국가무형문화재 제28호로 고려 말에서부터 조선 말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의류의 주류를 이뤘던 무명의 대를 이어 개성의 송도목, 진주의 진주목보다 유명한 ‘나주세목’이라는 명품을 생산했다.

지난 1980년 전승공예대전 무명출품 입선을 시작으로 각종 대전에서 우승했다. 1992년 서울 덕수궁, 전남 나주국립박물관 일원에서 열린 제1회 마한문화축제 등에서 전시와 시연으로 시민과 함께하기도 했다.

이날 기자가 “이렇게 힘든 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하시면서 힘드시지 않느냐. 이 일을 가르쳐 주신 시어머니나 할아버지가 원망스러웠을 것 같다”고 묻자 “힘들었냐고? 아이고 겁나게 힘들었제. 베가 마음에 안 맞게 나오면(잘 안 짜지면) 눈물이 다 나왔당께”라고 답했다.

그에겐 몇 대째 내려오고 있는지도 모르는 오래된 베틀과 직조기술을 유산으로 건넨 시어머니(김만애 기술 전수자), 그리고 젊었을 때 다니던 우체국을 그만두고 이 일만을 도운 할아버지가 밉지 않았다.

한국전쟁 전후 먹고 사는 것조차 힘들었던 시절,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몇 날 며칠 밤을 꼬박 새워도 베 몇 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선 이 세상에 대한 원망 따윈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부쩍 요즘 마음이 급해지고 불안하다고 했다. 며느리(원경희), 동서(김홍남) 등을 비롯한 몇몇 이수자가 있지만 하나같이 노진남 장인의 마음에는 흡족하지 못한 탓이었다.

옆에서 목화솜 씨앗 빼기(씨앗기)를 하고 있던 최석보(남편)씨도 “원경희, 김홍남은 10년 넘게 배우는 중이여. 실 뽑기는 잘하는데 다른 건 아직 당당 멀었어”라며 “어머니랑 안사람(노진남 장인)하고 우리 집안만 할 줄 아는 건디, 걱정이 태산이여”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최씨는 손수 무명을 재배하고 수확하며 베 짜기를 제외한(베 짜기는 여자만 하는 일) 모든 세목(무명)을 만드는 일에 동참했다고 했다.

씨아틀로 씨를 빼내는 씨앗기와 솜활이라는 기구를 이용해 솜을 부드럽게 하는 솜 타기, 탄 솜을 말판 위에 펴놓고 말대로 비벼 고치를 만드는 고치말기 등은 그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였다.

이 밖에 실잣기(물레를 이용해 실을 감는 과정), 무명 날기(실의 굵기에 의해 한 폭에 몇 올이 들어갈지 결정), 베매기(물 먹이기 과정) 등도 그의 몫이었다.

노진남 장인은 “그동안 여기서(전수관) 먹고 자고 하면서 배우려고 했던 사람은 정말 많았어. 근데 이일은 아무나 못 혀. 3개월 못 넘기고 다들 그만 둬버려”라며 “그런데 지금까지 중학교 3학년 여학생 딱 한 명 있었고 지금은 22살 됐는디. 그 애가 세상에나 100일 만에 실을 뽑더랑께”라고 말했다.

이어 “그 애가 참 보기 드문 애여. 머리 깎고 와서는 여기서 살면서 직접 자기 옷을 짜서 입겠다고 베를 짰어”라며 “여기 나주 베는 세목(비단처럼 곱고 가늘게 짠 무명)으로 짜는 거라서 어른들도 아무나 못 하는디, 딱 한 명 그런 애를 봤당께”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넘의 집 귀한 자식이라서 집으로 돌려보내 버렸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 노진남 장인과 최석보씨가 물레로 실 뽑기, 솜활을 이용한 솜 타기를 시연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전수관에 체험하러 오는 시민이 많냐는 질문에 “그동안 구경하러 많이 오셨어. 그런데 구경 온 할매들은 여기 베틀 보면 옛날 고생하던 거 생각나서 베틀 보고 다들 혀를 차고 갔당게”라며 “우리 동네도 나일론 들어오면서 60년대에 동네 아짐이 전부 이것을 강에다 던져 부렀어”라고 했다.

땔감이 없던 그 추운 겨울에도 베틀(물레)만큼은 아궁이에서 때면 우환이 돈다고 해서 강물에다 버렸다는 것.

하지만 노진남 장인만큼은 베틀을 강물에다 버릴 수 없었다.

전남 함평에서 7남매 중 장녀로 태어나 이곳 나주 샛골(다시면)로 시집와 줄곧 들은 말이 “물레를 끊으면 우환이 끓는다”는 것과 함께 유달리 노진남 장인은 베를 잘 짜서 동네에서도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베 짜기는 그의 생업이자 특기이며 유일한 취미였던 것이다.

그는 “딸도 며느리도 세목을 짜서 이불을 해주고, 한때는 옷도 다 지어 입혔어. 기분이 좋을 땐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베를 짰어. 이 좋은 것을 멈출 이유가 없었당께”라며 “베 짜는 일은 하늘이 나한테 준 일이었어. 평생을 베 짜면서 보낸 걸 나는 후회 안 했어. 앞으로 얼마나 베를 짤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여”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베틀에 앉아 기자에게 자신의 ‘최고보물’이라는 손때 묻은 베틀을 만져보게 했다. 그러면서 “이 베틀의 다음 주인이 누가 될지 우리 부부는 그게 젤 걱정이야”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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