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태 중국 북경화지아대학교 교수

 

‘야율초재(耶律楚材, 1190~1244)’는 요나라 황족 출신의 피정복민이다. 그는 17세에 금나라의 관직으로 등용돼, 몽골제국 원나라의 초대 재상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의 활약이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왜 그런가. 그는 몽골 출신이 아닌, 이민족의 신분으로 원나라 재상까지 지냈다는 점이 특이하다. 출중한 능력과 인품을 가진 그는 원칙을 지키며 국정운영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했다. 정치 일선에서 국가를 경영한 기간만 해도 약 30년이었으며, 보필한 왕은 칭기즈칸을 비롯해 4명에 달했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원나라는 힘 있는 왕국으로 건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중점을 둔 국정운영의 철학은 무엇이었던가. ‘단점을 없애고 이를 개선하는 데 역점’을 뒀다. 이는 장점을 늘리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더 많은 비중을 두는 오늘날 우리의 실정과는 다르다 하겠다.

칭기즈칸의 업적 중 세계 정복에 큰 힘이 된 요인을 꼽는다면, 국가나 인종 구분 없이 글로벌 인재를 등용했다는 데 있다. 그런 면에서 1215년 참모로 등용된 ‘야율초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칭기즈칸을 도와 원나라의 통치 제도, 이념, 법치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군사, 의학, 유교, 천문, 불교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학식을 활용해서 번영의 발판으로 삼았다. 몽골의 영웅 칭기즈칸의 탄생은 칭기즈칸 자신의 노력도 컸지만 ‘야율초재’라는 뛰어난 참모의 보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칭기즈칸이 이민족 출신의 야율초재를 높이 평가한 이유로는, 천부적인 재주에다가 원칙, 의리, 공정, 정의,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는 점이다. 야율초재는 사리사욕 억제, 권력 사유화가 아닌, 왕을 올바르게 보필하는 데 역점을 뒀다. 그러니 어찌 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지 않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신임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그에 상반되는 질투와 모함 역시 커지기 일쑤다. 야율초재 역시 몽골 무신들의 질투와 모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무신들의 비웃음, 비판, 질투가 끈질겼지만 그는 뛰어난 언변과 당당함으로 맞섰다. 무신들은 왕에게 “야율초재는 글만 읽고 쓰는 선비에 불과하다. 지금과 같은 전쟁터에서는 칼을 잘 사용하고 활을 잘 쏘는 장수만이 필요하다. 따라서 야율초재와 같은 사람은 필요 없다”라고 끊임없이 설파했다. 이러한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야율초재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짐은 물론, 왕에게 더 좋은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천하를 얻으려면 무신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문신도 필요하다. 칼을 잘 사용하려면 칼의 재료를 잘 선택해야 하며, 칼을 잘 만드는 기술자도 필요하지 않은가. 이런 면에서 무신, 문신 모두 필요하다”라고 왕을 설득했다. 또 “천하를 얻고 다스리려면 어느 한쪽에만 치우쳐 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주장을 한 그에게 왕은 절대적인 신임을 하게 됐으며 백성들까지 늘 존경의 대상이었다.

보통 권력자가 최고의 위치에 오르면 새로운 업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제도, 법령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야율초재의 정치 철학은 달랐다. 그는 좋은 정치란 이미 있던 제도나 법령을 개선하는 것에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 위험 요소를 줄이는 게 바로 혁신과 발전의 아이콘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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