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준 민속 칼럼니스트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정의 생활필수품이었던 성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던 의성군 성광성냥에 이어 김해 진영의 경남산업공사마저 올 7월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이제 남은 곳은 팔각성냥을 만들던 충남 아산의 UN상사뿐이다. UN상사도 케이크용 성냥 외에 팔각통의 성냥을 더 이상 만들지 않은 지 몇 해 됐다. 

성냥을 처음 만든 사람은 영국 화학자 존 워커다. 1826년 화학실험 중 우연히 ‘마찰성냥(friction match)’을 고안했다. 현재와 같은 ‘안전성냥’은 1847년 스웨덴 사업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성냥’은 석류황(石硫黃)에서 유래된 말이다.

우리 조상은 이보다 훨씬 이전부터 ‘마찰성냥’을 사용해 왔음이 2011년 밝혀졌다. 독일 그라시 민속박물관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홍만선(1643~1715)의 ‘산림경제’와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기록으로 남아 있던 ‘인광노(引光奴)’가 그것이다. 

성호사설에는 “화(樺)나무 껍질로 많이 만드는데 처음에는 새벽에 일어나 글 읽는 자가 만들었다. 부싯돌에 인화 물질을 대고서 부쇠로 친 다음 유황에다가 불꽃을 일으키면 등불 켜기가 쉽다”고 기록돼 있다.

우리나라에 성냥을 처음 들여온 사람은 봉원사 승려였던 이동인이다. 그는 1880년 9월 수신사 김홍집과 함께 일본에서 귀국할 때 성냥을 가져왔다. 이 때 석유와 램프도 들여왔다.

이후 우리나라에 성냥공장이 처음 생긴 것은 1880년대 중반이다. 성냥의 대중화는 1910년대 부산과 인천 등지에 공장을 지으면서 부터다. 호황을 누리던 1970년대는 공장수가 300여개에 달했다.

쌍노루표(대한성냥), 기린표(경남산업공사), 비호표(대림성냥), 복표(인천성냥), 돈표(영화인촌산업), 비마표(조양성냥), 아리랑(조일성냥), 두꺼비표(금남산업), UN(유엔화학), 비사표(남성성냥), 향로(성광성냥)… 등 추억의 상표들이다.

‘인천의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노래도 이때 유행했다. 다방 테이블에는 반드시 성냥이 놓여 있었고 애연가들과 연인들은 성냥개비 탑 쌓기 놀이를 하면서 사랑을 키우기도 했다. 당시 가정의 중요한 생필품이기 때문에 선물용으로도 인기가 좋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부터 1회용 라이터가 등장하고, 가스는 자동 점화되고, 난방은 전기로 하는 세상이 되니 성냥공장은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된다. 

1948년 설립 후 70년 동안 기린표 성냥을 만들던 김해시 경남산업공사가 결국 올 7월 말 문을 닫았다. 김해시는 이 회사의 역사성을 인정해 공장에 있는 성냥 제조 기계와 현판 등을 역사박물관에 보존할 계획이다.  

1954년 설립된 경북 의성군 성광성냥도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2013년 말 가동을 중단했다. 이에 경상북도와 의성군에서는 근대 문화유산인 성광성냥 공장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세계의 성냥시장은 저가의 중국산이 차지했다. 미국과 유럽, 일본에서도 성냥 산업을 살리려고 노력중이다. 특히 유럽의 경우 향초 전용 성냥, 주요 관광지와 미술품, 사진 등을 연계한 관광상품 개발로 그 맥을 잇고 있다.

이제 성냥 만들던 공장의 기계소리는 멈췄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할아버지 곰방대에 불을 붙이던 성냥은 추억이 됐다. 

우리가 살아온 흔적이 또 하나 없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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