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은 재판 관계자들에게 부담스럽고 무거운 재판임에 틀림없을 것 같다. 1심 판결에 대해 나타난 엇갈린 반응이 말해주거니와 재판을 맡은 판사나 법원이 본전하기가 어려운 재판이다.

아무리 법대로 양심대로 선고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해도 그것에 대한 여론의 ‘만족’과 ‘불만족’의 크기는 각각이 거의 엇비슷하다. 이렇게 ‘만족’과 ‘불만족’의 크기가 엇비슷하다면 그 표출의 함성은 역사적으로 ‘불만족’을 터뜨리는 쪽의 것이 더 요란할 수밖에 없으므로 재판을 잘 했더라도 빛이 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자명하게도 본전하기가 쉽지 않은 재판이다. 혹여 재판이 명백히 바르게 못 이루어지는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때는 질타의 아우성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에 속한다.

더구나 재판은 탄핵으로 추락해 교도소에 간 제왕(帝王)적인 ‘구(舊) 권력’에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특검(特檢)이 기소한 사건이다. 시퍼렇게 살아있는 ‘현 권력’은 특검에 의해 기소된 재판의 범죄구성요건적인 팩트(fact)에 대해 전형적인 정경유착(政經癒着)적 ‘적폐(積幣)’라고 규정했다. 그래놓고 매섭게 재판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이러니 재판에 참여하는 관계자들의 어깨가 무겁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 될 것이다.

1심 재판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뇌물죄를 적용해 5년 형을 선고했다. 이에 엇갈리는 반응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짐작한 대로다. 예상을 깬 중형이라는 반응이 있는가하면 고질적인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기 위해 중형의 선고는 당연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물론 그런 정도의 선고는 예견된 것이며 형량에 무리가 없다는 반응도 없지 않았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어는 쪽이든 그 반응들에 착잡함이 배어있지 않은 반응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착잡함’이라는 소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 재판이 여느 재판과는 확연히 다른 주목받는 각별한 재판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착잡함이 피의자 개인과 소유 기업에 대한 여론의 선호와 관련을 맺고 있다거나 친 재벌 또는 반 재벌 정서를 가진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감정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 감정은 두루 배어있다. 또한 재판은 갈 길이 멀다. 따라서 그런 정서는 아직은 형량의 많고 적음과 재판의 공정성만을 따지는 문제에 닿아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재판은 다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극렬한 일부를 제외하면 일반의 여론은 놀랍도록 냉정하다. 부화뇌동 없이 차분하게 재판을 지켜보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데 만약 그에게 무죄나, 처벌 시늉 정도에 그치는 극히 가벼운 형이 선고됐더라면 여론의 풍향은 지금과는 사뭇 딴판으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필시 그랬을 개연성이 크다. 모르긴 몰라도 모두가 허탈해하며 서로에게 ‘무전유죄 유전무죄(無錢有罪 有錢無罪)라 하지 않았나. 그가 바로 재벌이지 않은가. 그럴 줄 몰랐어?’ 하고 빈정대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재판은 매의 눈을 뜨고 지켜보는 권력이나 여론의 눈치를 살핀 나머지 판결이 중심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것이 재판의 금과옥조(金科玉條)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재용 재판이 갖는 각별한 비중은 ’가만히 있으려는 나무를 바람이 흔들어대듯(樹欲靜而風不止/ 수욕정이풍부지), 여론이 그 재판을 가만 놓아두려 하지 않는다. 이래서 재판은 이래저래 본전 찾기가 어려운 재판일 수밖에 없다. 물론 여론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나쁜 여론이 나쁜 것이며 다 배격해야 할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선별의 눈은 필요할 성 부르다.

어떻든 사회정의를 위해 법은 중요하지만 만능은 아니다. 예컨대 정경유착의 비리를 근절하자면 그것의 뿌리인 권력의 갑(甲)질을 도려내는 것이 우선이 돼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것은 그대로 놓아둔 채 기소된 기업인만 실정법의 규정을 충실하게 들이대어 처벌하면 잡초의 뿌리는 손대지 않고 또 돋아날 잎사귀만 뜯어내는 꼴과 다를 것이 없다.

갑질한 당사자와 기업인을 동시에 재판해 처벌한다고 해도 기업인의 처벌은 부차적인 것으로 하고 중벌의 몫은 갑질한 권력자의 것이 돼야 타당하다. 그래야 정의가 바로 선다. 이래야 또한 법이 만능은 아닐지라도 제구실을 다하게 된다. 이건 원론적인 문제이지만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형 선고의 반응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정경유착은 기업인이 주도한다기보다 갑질하는 위압적인 권력이 주로 주도한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 기업인의 경제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갑질이 말썽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로되 그런 기업인도 권력의 갑질 앞에서는 오금을 펴지 못한다. 국회 청문회장에 불려 나온 기업인들이 정치인들의 호통에 바짝 주눅 든 모습을 보여주곤 하는 것이 그에 대한 생생한 증거다. 그렇지만 사법부는 공정한 재판의 ‘결산서’를 내어 국민에게 사법적 서비스를 해야 할 책무를 안고 있다. 그러려면 더 말할 것 없이 이 같은 권력의 갑질을 도려내는 사법적인 척결 의지를 최종 선고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 결정적인 시험대가 지금 벌어지는 이재용 부회장의 재판 마당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도 그의 재판은 주목을 끈다.

반드시 그래야 하지만 재판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면 아무리 한국 경제의 간판 기업인이라 해도 재판결과에 여론은 승복한다고 봐야 한다. 아무도 법의 공평성을 비켜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처한 내외의 난국에 비추어 법 규정만에 집착해 그것을 충실히 숭배하거나 교묘하게 비트는 재판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 기왕이면 사법적 정의도 살리고 경제와 기업인의 의욕도 살리며 나라도 살리는 솔로몬(Solomon)의 명(名)판결이 나왔으면 한다. 그런 명판결을 국민이 기다리기에 이 재판을 세기의 재판이라 부른다.

나라밖에서 한국의 위치를 얼른 못 짚어 내고 한국 대통령이나 그를 기소한 특검들과 재판관들의 이름은 몰라도 이재용과 삼성전자의 이름은 쉽게 댄다. 그만큼 그의 신용이 한국의 신용이며 그의 얼굴이 우리의 얼굴이 된 형편이다. 정경유착과 과거의 적폐 청산도 좋고 재벌 개혁도 좋지만 재판이 잘못되면 그것은 그만 우리 스스로가 우리에 자행하는 자해(自害)가 되고 말 소지가 있다.

재판은 이래저래 관계자들에게 부담스럽고 무겁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런 재판을 지켜봐야 하는 국민도 착잡할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이런 류(類)의 재판이 가끔 벌어져야 하는 우리 현실이, 보복적 정치 풍토와 정경유착의 비리에서 우리가 벗어날 날이 아직 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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