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당의 영정(永貞) 원년(805년), 덕종이 병사하고 순종이 즉위하여 왕비(王伾)와 왕숙문(王叔文)을 보정으로 임명했다. 역사는 이들을 이왕(二王)이라고 부른다. 이왕은 무능한 주제에 일단 권력을 쥐자,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방자했다. 사람들의 생사는 그들의 마음에 따라 결정됐다. 사대부들은 이들을 마주칠까 두려워 거리에 나가지도 않았다. 순종은 이왕에게 정치를 혁신할 능력이 있다고 오판했다. 고금을 막론하고 빨리 승진한 사람은 질투의 대상이다. 그것도 모르는 이왕은 겸손할 줄 모르고 축재에만 열을 올렸다. 정치적 꼼수는 왕숙문이 시작했다. 정권을 장악하려면 먼저 재물에 대한 권한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두우(杜佑)에게 재정과 염철관리를 맡겼다. 그러나 완전히 믿지 못하고 자신이 부사가 되어 실권을 행사했다. 또 위집의(韋執誼)를 허수아비 재상으로 삼고 재상부의 일은 자기가 마음대로 처리했다. 욕심은 많았지만 자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고, 병권이 없어서 빈틈이 많았다. 게다가 신책군의 지휘권을 두고 환관들과 충돌했다.

이왕과 환관 사이의 충돌은 태자를 세우는 문제로부터 시작됐다. 모든 일은 순종의 명의로 마음대로 처리했으나, 일단 태자가 책립되면 태자국감(太子監國)에서 국사를 관장한다. 그렇게 되면 권력을 잃게 될 이왕은 태자책립에 반대했다. 천자가 병이 들면 태자를 책립해 국가를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조치였다. 어떤 이유로도 태자책립은 막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자기에게 유리한 사람을 태자로 책립해야 한다. 그러나 이왕은 반대만 하다가 환관의 수령 구문진(俱文珍)과 유광기(劉光琦) 등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이왕을 싫어하는 이순(李純)이 태자로 책립됐다. 뒤늦게 실책을 깨달은 왕숙문은 두보(杜甫)의 제갈량사당(諸葛亮祠堂)에 있는 시를 읊으며 두려움을 달랬다.

“출사미첩신선사(出師未捷身先死), 상사영웅누만금(常使英雄淚滿襟).
출전하여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자신이 먼저 죽게 되었으니
언제나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로 옷자락을 적시게 하네.”

감히 제갈량과 자신을 견주었던 이왕의 전횡은 막을 내렸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지 못했다. 무능하고 간악한 무리들은 막이 내려올 때도 끝까지 잔머리를 굴린다.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신종이 환관에게 관료들의 반발을 이용해 환관들로부터 병권을 탈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왕은 환관들과 가까운 범희조에게 신책군을 맡기고 당원 한태(韓泰)를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임명했다. 범희조의 명성을 앞세우고 실질적인 권한은 한태에게 맡겨 신책군의 지휘권을 탈취하려고 했던 것이다. 환관들은 즉시 왕숙문을 한림학사에서 해임해 권력의 한 쪽을 허물었다. 중요한 시기에 왕숙문과 그의 꼭두각시 위집의의 갈등이 벌어졌다. 환관들의 방해로 범희조와 한태는 군사를 움직이지 못했다. 이왕은 이미 지는 해였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불운하게도 왕숙문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다. 왕숙문은 휴직하고 말았다. 리더가 사라진 이왕 일당은 마지막 기회마저 놓쳤다. 순종이 태상황으로 물러나자 보호막도 사라졌다. 얼마 후 왕숙문은 피살됐다. 불과 7개월 동안 권력을 누린 그들을 제거한 사건은 영정혁신이라는 거창한 구호로 남았다. 실패의 원인은 사회적 기반의 결핍이었다. 이왕은 명문거족 출신도 과거출신도 아니었다. 순종마저 중병에 걸리자 유일한 기반마저 잃게 됐고, 설상가상으로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킨 것이 몰락의 결정적인 이유였다. 어떤 계략이라도 정확히 형세를 파악한 후 추진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이 성공했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모방한다든지, 고양이를 보고 호랑이를 그리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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