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구암 허준(2013년)’ 스틸. (출처: MBC)

김쾌정 허준박물관 관장
“유의태 허구… 스승 안 밝혀져
이름 비슷한 유이태, 후시대 인물
아버지·어머니 이름 모두 달라”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지난 2000년 2월 29일 방영된 MBC 일일드라마 ‘허준(연출 이병훈, 극본 최완규, 1999.11.29~2000.06.27)’ 30회에서 위암에 걸린 ‘유의태(이순재 분)’는 의학 발전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동굴에서 유의태는 제자 ‘허준(전광렬 분)’에게 남긴 유서를 통해 “내 몸이 썩기 전에 내 몸을 가르고 살을 찢거라. 그리하여 사람의 오장육부의 생김새와 그 기능을 확인하고 몸이 얽힌 이치를 살펴 네 의술 정진의 계기로 삼길 바란다”고 전했다. 허준은 스승의 죽음에 오열하며, 해부할 수 없다고 버티다가 결국 해부하는 길이 ‘스승님이 영원히 사시는 길이다’를 되뇌며 유의태를 해부한다.

드라마가 방영된 후 언론들은 대부분 ‘허준의 일대기 중 가장 큰 사건의 하나로 손꼽히는 사건’이라고 소개했다.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을 원작으로 제작된 드라마 ‘허준’은 조선 시대 최고의 명의 허준의 삶을 그린 퓨전 사극이다. 이 드라마는 한국방송사상 역대 최고 시청률 순위 4위(63.7%, 2000년 6월 27일)를 기록하며 신드롬 수준의 높은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온 국민은 450여년 전 스승을 해부해 한의학에 힘쓴 대단한 인물이라고 알게 됐다. 당시 허준은 정말 스승 유의태를 해부했을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  21일 서울 강서구 허준박물관에서 만난 김쾌정 허준박물관 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21일 서울 강서구 허준박물관에서 만난 김쾌정 허준박물관 관장은 “허준 위인전·만화·소설·드라마 속 내용은 너무 엉터리가 많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드라마와 소설로 인해 허준과 주변인물 또 그의 일대기가 왜곡돼 알려졌다는 것이다.

허준의 일대기는 전광렬 주연의 ‘허준’ 이외에 소설 ‘동의보감’, 드라마 ‘집념(1975년)’ ‘동의보감(1911년)’ ‘구암 허준(2013년)’, 영화 ‘집념(1976년)’ 등으로 제작된 바 있다. 하지만 인기에 비해 역사적 자료가 부족한 편이라 허준에 대한 사실이 왜곡·미화·허구·과장 됐다는 게 김 관장의 설명이다.

역사가 왜곡된 부분은 ▲가족의 이름과 출생 ▲관직 진출과 활동사항 ▲스승과 신체 해부 등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 허준박물관에 있는 허준 족보. ⓒ천지일보(뉴스천지)

◆가족의 이름과 출생

드라마와 영화, 소설에서 허준의 아버지는 ‘허륜(崙)’이라고 나온다. 이는 왜곡된 것으로 ‘내의선생안’을 보면 사실을 알 수 있다. ‘내의선생안’은 조선 세조~순조까지 약 350년에 걸쳐 316명의 내의원 어의들을 연대순으로 성명·관직명·생년·출생지·본관 등 인적사항을 기록한 명부다.

이 책은 본래 세조 이전 시대 때부터 존재했으나 임진왜란 때 잃어버렸다. 허준은 보고 들은 것들을 모아 내의선생안을 편찬했고 서문을 달았다. 허준이 자신의 인적사항을 직접 기록한 것이니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 김 관장의 주장이다.

이 책에 따르면 허준은 후삼국말기에 왕건을 도와 경기도 양천 지역에서 세력을 가지고 활약한 허선문의 20세손이다. 아버지는 평안도 용천부사, 함경도 종성부사, 전라도 부안군수를 역임한 무관 출신 허론(碖)이다.

드라마에서 허준 어머니는 해미읍성의 손씨 성을 가진 천한 기생 출신으로 등장한다. 실제로는 영광 김씨로 당시 영광 군수로 있던 김욱감의 서녀다.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유희춘의 친필 일기인 ‘미암일기’에 따르면 허준의 외조부 정실부인 아들이 김시흡이다. 허준의 어머니는 김시흡의 배다른 동생으로, 영광 김씨라는 뜻.

또 부인은 전주 이씨로 표현돼 있는데 족보에서 허준의 부인은 안동 김씨다. 최근까지도 사전류를 근거로 게재한 신문, 잡지 기사 등은 허준의 출생 연도를 1539년, 1545년 등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내의선생안’에서 허준의 출생 연도는 1537년(정유생)이다. 김 관장은 “간단하고 기초적인 자료마저 참고하지 않고 서술한 무책임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개탄했다.

▲ 드라마 ‘허준(1999)’ 스틸. (출처: MBC)

◆관직 진출과 활동사항

많은 사람이 허준이 의과시험에 합격해 내의원에 입사하게 됐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의과시험 합격자 명부인 ‘의과방목’에는 허준이 이름이 등재돼 있지 않다. 게다가 의과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면 종8품, 2등은 정9품, 3등은 종9품직을 받게 된다. 1등 합격자가 종4품 내의원 첨정이 되려면 최소 20년이 소요된다.

하지만 허준은 31~33살 사이에 종4품 내의원 첨정 자리에 오른다. ‘미암일기’에 보면 함경북도 종성으로 유배 간 유희춘이 이조판서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편지를 보낸 내용이 있다. 아버지의 벼슬을 지내기 위해 함경북도로 간 허준은 유희춘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해 그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계속된 교류 덕분에 파격적인 승진으로 내의원에 들어갔다.

그는 생전에 ‘찬도방론맥결집성’ ‘언해태산집요’ ‘언해구급방’ ‘언해두창집요’ 등 10종의 저서를 남겼으나 대개 6~7종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 영화 ‘집념’ 스틸.

◆스승과 신체 해부

소설과 드라마에 등장하는 허준 스승 유의태는 허구의 인물이다. 발음이 비슷한 유이태(1652~1715)는 조선 후기 숙종 때 어의를 지낸 의원으로, 허준보다 115년 뒤에 태어났다.

허준의 어릴 적 스승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허준의 아버지는 적자와 서자를 가리지 않고 교육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허준의 동생 허징도 서자 출신이면서 통정대부, 목사 등을 역임했다. 허준이 의학을 선택하게 된 것은 집안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집안은 대대로 많은 의학자를 배출했다. 김 관장은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으며 독학으로 의학의 깊은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승 유의태가 허구이니 유의태 신체를 해부했다는 이야기도 거짓이다. 조선 시대 유교 사회에서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신체를 훼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신체발부수지부모(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에 따라 머리카락, 손·발톱마저도 함부로 자르지 않았으며 이를 고스란히 모아 사람이 죽으면 관에 같이 묻었다.

김 관장은 “드라마·소설이 사실을 입각해 제작돼야 독자·시청자가 오해하지 않는데 너무 엉터리로 만드니 속상하다”며 “많은 사람이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내용을 사실인 양 믿고 있는 것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우리 박물관은 이 같은 사실을 알려주는 일을 하고 있다”며 “역사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며,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국보 동의보감을 서술한 허준을 제대로 알고, 본받을 것은 본받아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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