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 한체대 스포츠 언론정보연구소장 

 

지난 25일은 오한남 대한민국 배구협회장에게 영영 잊혀질 수 없는 날이었다. 이날 서울 강남구 리베라호텔에서 제39대 회장으로 취임식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오 회장은 국회의원 출신의 장영달 전 회장, 조원태 한국배구연맹 회장 등 많은 배구관계자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았다. 이날 취임식은 오 회장 개인으로는 한국배구를 이끌어 나가는 최고 수장에 올랐다는 점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정통 배구인 출신으로 선수, 코치, 감독 등을 지난 수십년 동안 거쳐오면서 그는 자신이 협회장 자리까지 오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배구에 대해 누구보다도 애정이 많고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있지만 협회장까지는 넘보지 않았던 것이다. 

오 회장이 협회장이 된 것은 어쩌면 한국배구가 처한 시대적인 상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배구계 원로들을 중심으로 그동안 쌓였던 한국배구의 적폐를 해소하고 새로운 개혁을 하기 위해서 적합한 인물로 그를 추대했던 것이다. 지난 6월 30일 투표로 치러진 협회장 선거에서 오 회장이 많은 지지를 받아 당선된 것은 큰 변화를 바라는 배구인들의 뜻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대한배구협회장이라는 자리는 그동안 배구인보다는 정치인, 경제인 등이 오랫동안 맡아왔었다. 해방이후 혼란기를 거쳐 지난 1960년대 국세청장과 상공부 장관을 지낸 이낙선씨가 오랫동안 회장을 맡아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한국구기 사상 처음으로 여자배구가 동메달을 따내는 등 배구 저변을 확대하며 기틀을 다졌다. 1980년대 이후 조석래 전 효성그룹 회장, 김중원 전 한일합섬 회장, 안병화 한국전력 사장 등 굵직한 경제계 인사가 협회장을 이끌며 배구의 인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하지만 프로배구가 독립해 나간 2000년대 이후 여러 회장을 거쳤고, 최근에는 배구인 출신 박승수 회장, 서병문 회장 등이 잠시 협회를 맡게 되면서 어려운 고비를 맞았었다. 협회 재정이 고갈되고, 경기인들의 대립과 반목이 이어지면서 협회는 한때 사고단체로 전락할 위기도 맞았다. 지난해 서병문 회장이 공약을 이행하지 못한 이유로 사상 초유의 대의원 불신임으로 퇴진, 6개월여의 회장 공백사태를 겪었던 것이다.

협회는 전국 각 시도 회장으로 비상대책위를 꾸려나가며 해임에 불복한 서 회장의 효력정지 가처분 소송에 대비하면서 새 회장을 모시기 위한 작업을 조용히 해나갔다. 비상대책위원들은 협회장의 부재 속에서 올해 월드리그 남자국제배구대회와 그랑프리 여자 국제배구대회에 출전한 남녀대표팀의 지원을 무난히 해내며 불안했던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평생 배구인으로 살아온 오 회장은 배구계 안팎으로 처한 환경을 무엇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는 “현재 배구계를 보면 비행기가 이륙하려다 외부에서 불어오는 강력한 바람과 내부에서 생긴 엔진 이상 등으로 제대로 뜨지 못하고 뒤뚱뒤뚱 하는 모습이 연상된다”며 “정상적으로 이륙하기 위해서는 바람을 제대로 통제하고 엔진을 잘 정비해야 한다. 앞으로 내외부의 험한 상황 등을 잘 추스려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배구 명문 대신고에서 공격수와 세터로 활약하며 기록적인 148연승을 이끌었고, 명지대-대한항공을 거쳐 국가대표로 뛴 오 회장은 은퇴 후 여자 실업팀 한일합섬 감독을 역임한 뒤 중동으로 건너가 아랍에미리트 배구팀과 바레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명성을 날렸다. 오 회장은 바레인에서 감독 생활을 마친 뒤 1990년대 사업가로 변신, 음식점과 호텔 등을 운영하며 성공적인 삶을 개척했다.

오 회장은 “평소 배구를 할 때, 배구인의 자존심을 지키며 배구에서 받은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사업을 통해 터득한 비즈니스 감각과 인간관계 등을 협회 운영의 정상화를 하는 데 많이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배구 소년’에서 엘리트 선수와 지도자를 거쳐 사업가로 성공한 오 회장이 대한배구협회호를 순항에 돛달듯 항해를 해 나갈지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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