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은 도시의 경계이면서, 도성민의 삶을 지켜온 울타리다. 근대화를 거치면서 도성의 기능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한양도성은 서울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발굴과 복원과정을 거치면서 잃었던 모습이 되살아나고 있다. 이와 관련, 한양도성 전 구간인 18.6㎞를 직접 걸으며 역사적 가치를 몸소 체험하고자 한다.

 

▲ 성곽마루 부근의 멸실 구간, 남소문터, 그리고 이곳의 성벽이 과거에는 길게 이어져 있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성곽마루인 팔각정부터는 성곽이 끊겼다. ‘멸실 구간’이라 적힌 안내판의 문구가 현실을 또다시 알려줬다. 옛 선조들의 피와 땀의 결과물인 한양도성. 원형 그대로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선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성곽이 다시 연결됐을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단절된 성벽, 사라진 남소문

단절구간에는 테니스장과 골프연습장이 있었다. 반야트리클럽·서울스파도 나왔다. 반야트리클럽·서울스파의 전신은 타워호텔이다. 타워호텔은 남산의 동쪽 끝자락에 성벽을 끊고 들어온 자유센터의 숙소동이었다. 리모델링하면서 한양도성의 기저부가 발굴됐으나 다시 흙으로 덮여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 남소문터 표지석 ⓒ천지일보(뉴스천지)

반야트리클럽·서울스파 건물을 나와 국립극장 앞으로 가면 순성길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 전에 인근의 남소문(南小門)터를 찾았다. 남소문은 한양도성 4소문 중 하나였다. 지금의 중구 장충동에서 용산구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조실록에 보면, 이 문을 축조한 연대는 나타나있지 않다. 다만 세조 2년 11월 20일에 세조가 종친과 재상들을 거느리고 청학동(현 장충동 일대)에 나가서 건립 예정지를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건립된 남소문은 1469년(예종 1) 폐쇄됐다. 세조 3년 “남소문을 낸 뒤에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말이 나돌아 문을 철거해버렸다. 동남쪽에 문을 내면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는 음양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도적떼가 출몰한 사실도 폐쇄 원인이었다.

표지석에는 ‘서울의 소문으로 세조 때 세우다 예종 원년 음양설에 따라 철거, 그 후 일제강점기에 주초마저 없어지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표지석을 통해 남소문 위치를 알 뿐이었다.

▲ 남산을 따라 쌓인 성벽 ⓒ천지일보(뉴스천지)

◆남산에 축조된 600년전 성벽

남소문터를 본 후 다시 순성길로 발길을 돌렸다. 국립극장 앞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건너 남산공원으로 향하는 길이 이어졌다. 길을 따라 걸으니 숲 사이로 멀리 성곽이 보였다. 성곽마루 부근의 멸실 구간, 남소문터, 그리고 이곳이 과거에 성곽으로 길게 연결됐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옛 모습을 상상할 뿐 이었다.

이곳에서 남산 정상으로 갈 때는 차도를 따라 걷는 방법도 있지만, 기자는 가파르게 쌓인 성곽을 따라 만든 나무계단을 걷기로 했다.

나무계단 시작점부터 높은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태조 대 축성된 성벽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구간이다. 600여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한양도성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곳 이었다.

▲ 남산 나무계단 맨 위쪽의 전망대에서 바라본 도심ⓒ천지일보(뉴스천지)

계단을 오르다보니 한 외국인이 나무계단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어쩌면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를 잘 느끼고 있는 건 아닐까.

한참을 오르니 나무계단의 끝이 보였다. 그곳에는 도심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다. 기자가 걸어온 남산구간도 한눈에 들어왔다.

이곳을 지나 10분 정도 걸으면 남산타워가 나온다. 남산타워는 남산 정상에 우뚝 솟은 전망 탑으로 해발 480m 높이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서울시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다.

남산타워로 올라가는 길옆에는 낮은 성곽이 쌓여 있었다. 남산에 오면 늘 보던 성벽이지만, 이날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 남산 팔각정 ⓒ천지일보(뉴스천지)

◆남산 팔각정과 봉수대

잠시 후 남산 팔각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산 팔각정 자리는 조선시대 국사당이 있던 곳이다. 조선태조는 남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고 이 산에서는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는 국가 제사를 지내게 했다.

국사당은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인왕산 기슭에 옮겨졌다. 제1공화국 때에 옛 국사당 자리에 탑골공원 팔각정과 같은 모양의 정자를 짓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를 따 ‘우남정’이라고 했는데 4.19혁명 이후 팔각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 남산 봉수대 ⓒ천지일보(뉴스천지)

남산 봉수대도 있었다. 남산 봉수대는 조선시대 전국팔도에서 올리는 봉수의 종착점이었다. 봉수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변방의 정세를 알리는 시각 신호를 말한다.

평시에는 1개의 봉수를 올렸으며, 변란이 생기면 위급한 정도에 따라 2개부터 5개까지 올렸다. 남산 봉수대는 1423년(세종 5)에 설치돼 1895년까지 500여년간 존속했다. 현재의 봉수대는 1993년에 추정 복원한 것이다.

◆남산 회현자락

봉수대를 지나면 계단으로 된 내리막길이다. 길옆으로는 높지 않은 성곽이 이어져 있었다. 남산 회현자락이다. 서울시는 지난 2005~2015년까지 3단계에 걸쳐 남산 회현자락(아동광장, 백범광장, 중앙광장) 한양도성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 남산 회현자락 성벽 ⓒ천지일보(뉴스천지)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훼손됐던 한양도성의 기저부가 드러났다. 한양도성이 훼철된 주요 원인인 조선신궁 부지 조성 및 건축 과정에서 성곽을 파괴하고 평탄화한 증거임을 증명할 수 있는 유구들도 확인됐다.

또 그간 문헌을 통해 단편적으로 알 수밖에 없던 시대별 축조기법과 축성술의 발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줬다.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백범광장에 도착했다. 장충체육관에서부터 백범광장까지의 세 시간. 한양도성의 일부였지만, 태조 대 지어진 성벽이 잘 남아있어 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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