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준 민속 칼럼니스트 

 

십수년 전 내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두 분 모두 삼베수의를 입고 가셨다. 삼베수의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직접 마련하셨다. 병원에서 돌아가셨으나 당연히 전통적인 상례풍습을 따른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삼베수의가 우리 고유의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영좌의 국화 장식, 완장, 영정사진, 리본 등 오늘날 장례문화의 대부분이 일본 식민지통치 유산이라고 밝혀져 매우 놀랐다. 최연우 단국대 전통의상학과 교수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한민족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만든 ‘의례준칙’에 따른 것이므로 조속한 청산을 주장했다.

의례준칙에는 비단수의를 금지하고 포목(布木-삼베와 무명)으로 수의를 마련하게 했다.

조선 중종 때 유교교리를 근거로 만들어진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보면 왕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최고급의 비단이나 명주 등을 수의로 사용했다. 혹은 고인이 평소에 즐겨 입던 옷을 수의로 사용하기도 했다.

삼베수의는 가난한 이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경우였다. 대신 삼베옷은 고인의 자식들이 입는 상복이었다. 부모를 여읜 죄인이라는 의미로 거친 삼베옷을 입었다.

조선시대 분묘 발굴에서 비단, 무명, 모시로 만들어진 수의가 다수 발견됐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제정한 ‘의례준칙’은 삼베수의가 확산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일제가 삼베수의를 강요한 뜻은 싸구려 수의를 입힘으로써 조상을 극진히 모시는 한민족의 자긍심을 없애려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일본의 교묘한 문화정책에 속아왔던 것이다.

상주 등 유족이 팔에 차는 완장과 왼쪽 가슴에 다는 리본도 일제강점기의 잔재다. 네 줄 완장은 맏아들, 세 줄은 둘째 이하 아들, 두 줄은 사위, 한 줄은 형제·손자 등이 각각 차고 상을 치렀다.

근조 화환을 상가에 세워놓는 풍습도 마찬가지다. 우리 조상은 상여에 장식하는 화려한 종이꽃(꽃상여) 이외에는 상가에서 생화를 사용한 적 없다. 영좌 뒤를 장식하는 국화도 일본에서 유입된 문화다. 국화가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영좌 뒤에 병풍을 세우는 게 우리 조상의 일반적인 전통이다. 글씨나 그림이 없이 흰 종이나 천을 발라 놓은 병풍인 소병(素屛)을 사용했다.

올해가 광복이 된 지 72년이 지났으나 강점기 시대 일본 문화가 우리의 전통장례문화로 둔갑해버렸다.

안타까운 것은 일본이 격하시킨 잘못된 장례문화를 국민 대부분이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위안부 할머니와 일반 국민들까지 모두 다 일제가 만든 장례 풍습인지도 모른 채 삼베수의를 입고 마지막 길을 가셨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