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수궁 출입문의 원래 이름인 ‘대안문(大安門)’ 현판(위)과 경운궁 남쪽에 자리한 인화문(仁化門) 현판.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1897년 2월, 1년여 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던 고종은 경운궁(慶運宮, 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환궁을 준비하며 1896년부터 경운궁 조영을 시작했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잠시 거처했고,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했던 곳이다. 이후 200여년이 넘도록 조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적 없는 정릉동 행궁은 제국의 황궁으로 선택된다.

대한제국 선포 후 10년(1897~1907년)이라는 짧은 기간,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경운궁에 세워졌다가 이후 나라의 운명과 함께 옮겨지거나 철거돼 현판으로만 남아있는 문과 전각들. 이를 조명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관장 김연수) 1층 기획전시실Ⅱ에서 ‘현판으로 보는 대한제국 황궁, 경운궁’이 열린다. 전시에서는 대한제국의 황궁이던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의 여러 문과 전각에 걸렸던 현판 13점을 한 곳에서 소개된다.

전시는 궁궐 공간에 따라 ‘경운궁 궁역과 문’ ‘문경운궁의 전각’ ‘경운궁 궐내각사’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시에서는 덕수궁 출입문의 원래 이름인 ‘대안문(大安門)’ 현판이 공개된다. 3미터가 넘는 대형 현판은 어떤 이유인지는 정확하진 않지만, 1906년 대한문(大漢門)으로 현판 이름은 바뀌게 된다.

경운궁 남쪽에 자리한 인화문(仁化門) 현판, 고종이 종묘 등 외부에 출궁할 때 주로 이용한 포덕문(布德門) 현판 등도 소개한다.

대한제국 초기 즉조당(卽阼堂)이 중화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경운궁 정전으로 사용되던 당시에 걸렸던 중화전(中和殿) 현판, 지금의 석조전 뒤쪽에 있는 2층식 서양식 건물인 구성헌(九成軒)의 구성헌(九成軒) 현판, 1904년 지어진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 엄씨의 처소였던 영복당(永福堂)의 영복당(永福堂) 현판을 살펴본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이번 현판 전시가 근대기 나라의 운명을 함께 겪어야 했던 경운궁의 역사를 읽고,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근대사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대한제국의 근대사적 의미를 함께 살피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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