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준 민속 칼럼니스트 

 

‘태’(胎)는 갓난아기의 탯줄이다. 탯줄은 어미가 아기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감성을 교류하는 통로다. 옛날부터 우리 선조들은 태에는 아이의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하여 출산 후에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민간에서 태를 처리하는 방식은 태우거나 땅에 묻는 풍습이 유행했다. 드물게 태를 말려 보관하거나 물에 흘려보내거나 돌에 매달아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왕실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태실을 만들고 태를 보관했다. 역사는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북 진천에 김유신 장군의 태실이 현존한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왕실에서는 왕자가 태어나면 태실을 조성하여 태를 땅속에 묻었다.

이때 돌로 태함(胎函)을 만들고 그 안에 태를 담은 항아리와 생년월일 및 태를 묻는 날을 새긴 태지석(胎誌石)도 함께 묻었다. 태실 앞에는 태비를 세웠으며 태봉산을 지키는 사람을 두었다. 또 왕실의 태실 건립 기록과 도면 등을 담은 의궤를 함께 만들어 보관했다.

이와 같이 조선 왕조에서는 태실을 담당하는 부서를 뒀고 풍수전문가가 명당터를 골라 태실을 조성했다.

우리 선조들은 태가 어디에 묻히는지에 따라 태 주인공의 무병장수와 인생의 길흉을 좌우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왕실이나 양반집에서는 좋은 터를 골라서 소중히 안장했다. 특히 세자의 태는 왕조와 국운까지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일반 백성들은 왕실의 태실이 자기 고향에 오는 것을 큰 영예로 생각했으며 태실이 설치되는 지역은 그 읍격이 승격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태실은 전국적으로 분포돼 있다. 특히 세종의 왕자태실은 성주군 월항면에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잘 보존돼 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1929년 조선총독부는 왕조의 정기를 끊기 위해 왕과 왕손의 태실 54기를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 구석에 강제로 옮겼다. 도중에 태실을 보관하던 항아리와 태지석을 바꿔치기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태실명당에 눈독을 들이고 있던 지역 권력자와 친일파들은 자기 선조의 묘를 그 자리에 썼다. 

최근 지방자치단체가 나서 태실 유적을 복원하는 분위기나 태실은 옮겨서 복원해도 되는 유적이 아니다. 문화재는 원형보존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병원에서 출산을 하기 때문에 태의 처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

대신에 일부는 제대혈(태반과 탯줄에 남아 있는 혈액)을 채취하여 난치성 혈액질환이나 면역결핍증에 대비해 냉동보관을 하여 둔다. 보건복지부가 2012년에 제대혈의 보관 현황을 조사해 보니 37만명이 넘었다. 

신라시대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 1400년 뒤 태를 의학적으로 활용할 것이라 예견하고 김유신의 태실을 조성했을까?

오늘날 산모들은 태를 보관했다가 아이의 돌에 맞춰 태 도장, 태 앨범을 만드는 새로운 민속현상도 생겨났다. 수천년 동안 가꿔온 태실문화가 현재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자손의 무병장수와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서 출생과 함께 돌을 쪼아 석함을 만들고 태를 보관하였던 선조들의 정성에 고개가 숙여진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