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853년 3월 28일, 크리미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35세의 나이팅게일이 간호사로 참전한 이 전쟁은 파리조약으로 종전이 될 때까지 3년을 끌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은 빈협정으로 약 40년 동안 평화체제를 구축했다. 나폴레옹을 격파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군대를 육성한 러시아는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오스만 터키를 노렸다. 당시 오스만의 영토였던 북사이프러스에는 그리스와 터키인의 갈등이 심화됐다. 그리스의 전략적 위치와 오스만제국의 붕괴를 노린 러시아 니콜라이1세는 그리스 독립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분쟁에 개입했다. 그리스와 러시아는 그리스정교를 믿었다. 터키의 반발은 당연했다. 1829년, 그리스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명분으로 다뉴브 일대에 군사력을 증강했다. 1833년, 운키아르-스켈레시조약으로 보스포르스와 디아다넬즈 해협을 점령한 러시아는 흑해를 장악했다. 

크리미아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성지순례였다. 가톨릭의 환심을 얻으려던 프랑스는 터키와의 협상을 통해 1852년 2월 성지순례의 길을 열었다. 러시아는 터키에게 그리스정교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권리를 내세워 반러시아 인사를 파면하라고 강요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의 요구를 거부할 것을 강요했다. 양국의 감정이 악화되자 러시아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점령했다. 연합국의 지원을 받은 터키는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남하하는 러시아군에 맞서 영국, 프랑스, 스르데냐, 오스만이 연합군을 구성했다. 전쟁은 흑해의 크리미아 반도에서 전개됐다. 1853년 11월 중순, 연합해군의 주력은 흑해에서 보스포르스 해협으로 철수했다. 터키 해군원수 오사마는 혼성함대에 보급품을 싣고 서해안의 바투로 이동하다가 러시아함대를 만나 시노프만으로 피신했다.

11월 30일 새벽, 시모프만에는 안개가 짙었다. 습격에 대비하여 오사마는 전 함대를 해안에 정박시키고 육지에 포대를 설치해 함대를 엄호하도록 명했다. 수송선을 안에 배치하고 전함을 외측에 배치하여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오후에 안개가 걷히자 6척의 전함과 2척의 순양함이 영국 국기를 달고 나타났다. 오사마는 원군이 도착했다고 기뻐했다. 12시 30분, 갑자기 8척의 전함에서 영국 국기가 내려오고 흰색 십자가 모양의 러시아 국기가 올라갔다. 오사마가 경계태세를 갖추라고 명했지만 이미 늦었다. 러시아함대에 장착된 720문의 중대구경함포가 작렬했다. 러시아함대는 선체를 3겹의 철판으로 감싸고 있었으며, 바람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터키함대는 태양을 마주보았지만, 러시아함대는 태양을 등지고 공격했다. 화력과 위치상으로 러시아가 유리했다. 불과 몇 분 후에 목조로 된 터키함대는 전멸했다. 해안에 설치된 터키군 대포가 포격했지만 러시아함대는 신속하게 물러났다. 오사마는 포위망을 돌파하다가 사로잡혔다.

전투에서는 주도권이 관건이다. 러시아 나히모프 제독은 흑해연안의 지형과 기후에 밝았다. 그는 오후까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안개가 짙다는 것을 감안하여 전함에 영국 국기를 게양했다. 오사마는 고립된 상황에서 원군을 기다리는 마음 때문에 신중함을 잃었다. 주도권은 러시아군에게 넘어 갔다. 러시아도 초전의 승리를 지키지 못했다. 최강인 영국과 프랑스 해군의 반격을 받고 세바스토풀 요새를 빼앗긴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마저 선전포고하자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전쟁은 1856년 3월 20일 파리조약으로 종결됐다. 러시아는 다뉴브강 하구와 흑해 인근에서 영향력을 잃었다. 러시아의 내해였던 흑해는 중립지역으로 변했다. 러시아의 남진이 저지됐다. 영국과 프랑스는 근동의 안전을 내세워 오스만제국의 개혁을 촉구했다. 앙리 뒤낭은 인도주의를 주창하며 국제적십자사를 발족시켰다. 어쩌면 그것이 이 전쟁의 가장 큰 성과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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