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 이완용은 1926년 2월 11일에 서울 종로구 옥인동 집에서 죽었다. 이완용의 집은 원래 서울역 인근의 약현(현 중림동)에 있었지만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후 군중들의 방화로 집 두 칸이 불탔다. 이후 신변의 위험을 느낀 이완용은 일본인 거주지인 왜성대 구락부, 장교동, 저동 등을 전전했다. 1909년 12월 22일 이완용이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의 칼에 맞아 죽을 고비를 맞았을 때 그는 저동에 살았다. 이후 이완용은 1911년 3월에 이문동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1913년 12월에 이완용은 옥인동에 새 집을 지어 이사했다. 옥인동 19번지에 위치한 이완용 저택은 대지 3천평에 안채는 조선식을 개조해서 지었고 바깥채는 서양식 2층 건물이었다.  

종로구 옥인동 19번지. 지금은 종로구 보건소 앞 19-10, 19-16, 19-46 등으로 지번이 여러 개 나누어져 있다. 이완용의 집을 찾아내어 그곳에 일제강점기 박물관을 만들면 어떨까? 아픈 역사도 역사이다.  

#2. 이완용이 죽은 다음 날 일본 천황은 그를 정2위로 추서하고 ‘대훈위국화대수장’이라는 최고의 훈장을 주었다. 총독 사이토는 그의 죽음에 대해 “이완용 후작은 동양 일류의 정치가에 비하여 하등의 손색이 없고 그 영풍은 흠모할 바가 많았는데 이제 유명(幽明)을 달리했으니 국가에 일대손실이며 통석을 금할 수 없다고 애석해 했다. (매일신보 1926.2.14.자)”

이완용의 장례는 거창하게 진행됐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유아사 쿠라헤이가 장의위원장을 맡고, 부위원장은 후작 박영효와 총독부 내무국장이 맡았으며 장의위원은 일본인과 조선인 명사를 망라한 50여명에 달했다.  

#3. 하지만 이완용의 죽음은 조선 언론에서는 조롱거리였다. 이완용이 죽은 이틀 후인 2월 13일에 동아일보는 1면에 “무슨 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그도 갔다. 그도 필경 붙들려갔다. 보호 순사의 겹겹 파수와 견고한 엄호도 저승사자의 달려듦 하나는 어찌하지 못하였다. … 누린 것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이제부터 받을 일, 이것이 진실로 기막히지 아니하랴 … 어허! 부둥켰던 그 재물을 이만하면 내놓지. 앙탈하더니 책벌을 이제부터는 영원히 받아야지!”

이완용에 대한 혹평 사설을 조선총독부가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총독부는 발행금지 처분을 내렸고, 동아일보는 해당 사설을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는 2월 14일 신문에 ‘본보 압수’라는 제목의 해명기사를 통해 사설이 삭제된 경위를 밝혔다.   

동아일보 사설 이후 이완용의 죽음은 더 희화화(戱畵化)됐다.

‘개벽’ 잡지는 “죽는다 죽는다 하던 이완용이 아주 죽고 말았다. 지하에 있는 이재명은 ‘아, 이놈아 인제야 죽었구나’ 하고 웃겠지만 팔자 궂은 과부며 누이는 유달리 더 슬퍼할 것이다. 그런데 경성의 청소부들은 ‘이제부터는 공중변소의 벽이 깨끗해지겠으니 무엇보다 좋겠다’고 치하하겠지”라며 이완용의 죽음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당시 경성의 공중변소 벽에는 ‘이·박 요릿집’이라는 낙서가 심심찮게 휘갈겨져 있었다. 이(李)는 이완용, 박(朴)은 박제순을 말하고 변소가 ‘요릿집’이라 함은 이들이 ‘똥을 먹은 개’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완용의 죽음으로 이런 낙서가 사라지게 되어 청소부들이 편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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