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말레이시아는 이렇게 해도 되는가? 희대의 암살 테러를 단지 자국민 9명을 구한다는 차원에서 봉합하려는 말레이시아 당국의 처사에 세계 양심은 이렇게 되묻고 있다. 일각에서는 말레이시아 내부 정치정세가 이 사건을 봉합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즉 재집권을 위한 현 내각이 일단 북한의 테러를 외면하는 방향으로 사건을 종결했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에서 암살된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 시신이 46일 만인 3월 31일 북한에 넘겨졌다.

중국 외교부가 31일 “국제관례에 따라 인도주의 차원에서 중국은 시신 경유에 필요한 협조를 했다”고 밝힘으로써 김정남의 시신과 주(駐)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에 은신했던 암살 용의자 3명이 베이징을 경유해 북으로 돌아간 사실이 확인됐다. 전날 말레이시아 정부가 북한에 억류된 자국 외교관 가족 등 9명의 귀환 조건으로 시신과 관련자들을 북송하기로 합의한 결과다. 세계를 경악시킨 김정남 독살 사건이 중국의 ‘협조’ 아래 북의 책임규명도 못하고, 인질외교에 굴복한 최악의 선례로 남게 된 것이다.

말레이시아 당국은 수사 발표를 통해 북한 암살 용의자들의 이름까지 공개하며 배후가 북한임을 밝힌 바 있다. 자국 공항에서 화학무기로 암살을 자행한 살인 국가에 피해자의 시신을 넘겨주고 암살 용의자들을 출국시킨 것도 모자라 중단된 비자면제협정 재개 검토라는 ‘덤’까지 얹어준 것은 인도주의 원칙은 물론 주권국가로서의 자존을 포기하는 일이다. 외교관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는 등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을 무시한 행위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준 것도 위험하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말레이시아가 김정남 시신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제대로 설득 외교나 벌였는지 의문이다. 정부는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국가들이 특유의 연대의식으로 대북 압박에 동참하도록 이제라도 외교적 노력을 다해야 한다. 북한이 김정남이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서 ‘김철의 아내 리영희’가 시신 인도를 요구한다며 거두어 갔으니 저들의 국가테러를 고발할 1차 증거가 인멸될 가능성이 커졌다. 김정은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믿겠지만 화학전에나 사용하는 맹독성 무기로 살인테러를 자행한 북한의 실체가 만천하에 재확인됐다.

31일 주말레이시아 북한대사관에 은신해온 암살 용의자 2명도 같은 항공편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이들과 맞교환된 말레이시아인 9명은 북한에서 풀려나 본국으로 돌아왔다. 겉보기엔 김정남 피살 사건에서 비롯된 양국의 외교적 갈등이 봉합된 모습이다. 하지만 북한이 말레이시아 당국의 수사 결과를 부정하고 나아가 이번 사건을 체제선전에 활용할 경우 양국 간 외교적 마찰이 다시 불붙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김정남 살해에 연루된 북한대사관 2등서기관 현광성(44)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37)은 이날 새벽 말레이시아 항공편을 이용해 베이징에 도착한 뒤 주중 북한대사관으로 이동했다. 당초 1일 출발하는 고려항공 여객기에 탑승하기 위해 베이징에서 하루 머물 것으로 예상됐으나 시신 부패를 우려해 이날 낮 12시 중국국제항공 항공편으로 평양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전날 양국이 김정남 시신을 북한으로 돌려보내기로 합의한 데 따라 그간 억류됐던 말레이시아 외교관과 가족 등 9명은 말레이시아가 평양에 보낸 전세기편으로 이날 오전 5시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했다. 아니파 아만 외무장관이 직접 공항을 찾아 이들을 맞았다.

주북한 말레이시아대사관 외교관 모드 노르 아진 자인은 “괴롭힘을 당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김정남 피살 사건을 둘러싼 북한과 말레이시아의 협상에서 북측은 사망자가 김정남이 아닌 북한 외교관 ‘김철’이며 부인인 ‘리영희’가 남편의 시신을 평양으로 돌려받길 요구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여전히 억지 주장으로 일관하는 북한이 향후 신경작용제 VX에 의한 사망이라는 수사 결과를 뒤엎고 한국과 미국에 책임을 떠넘길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말레이시아로선 ‘인질’로 잡혔던 자국민들이 모두 풀려난 만큼 공세를 강화할 수도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사라왁주에서 불법체류 혐의로 적발한 북한 근로자 50명에 대해 추방 절차를 밟고 있다고 현지 일간 뉴스트레이츠타임스가 보도했다.

이번 사건이 제대로 수사되고 국제사회의 응징이 내려졌다면 북한은 1988년에 이어 다시 테러지원국가로 지정될 뻔 했는데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 나갔다. 그렇다고 그 사악한 암살행위가 역사에 묻힌다고 착각하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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