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한 성폭력 피해자가 대법원 재판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2011년 8월, 중학생이었던 피해자는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 중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연예기획사 대표 A씨에게 성폭력피해를 입었다. 이로 인해 임신이 됐고 병석에 계시는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할 상황이 안 되자 집을 나와 가해자와 생활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A씨는 다른 형사사건으로 실형을 받아 교도소에 가게 됐고 임산부인 피해자에게 매일매일 면회 올 것과 서신 쓸 것을 요구했다. 출산 이후 피해자는 A씨를 성폭력으로 고소했다. 

1심법원은 피고인에게 12년형을 선고했고, 2심은 9년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대법원은 성폭력이 아니라 ‘사랑’이라며 고등법원에 다시 판결하라고 사건을 파기환송을 했다. 2015년 10월, 고등법원은 무죄판결을 내렸고, 검찰이 재상고를 해서 현재 이 사건은 1년 5개월 동안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법원은 가해자가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이 사건은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데 이를 믿기 어렵다고 보았다. 그 이유로 피해자가 피고인을 접견한 횟수와 서신의 횟수 및 내용, 형식(색색의 펜을 사용하고 하트표시 등 각종 기호를 그리고 스티커를 사용하여 꾸미기 등)을 들었다. 카톡 문자메시지 등을 보면 피해자가 피고인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피고인이 구속된 뒤에도 그 감정이 지속된 것으로 보았다.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지 말고 조심하라’고 하는 등 둘의 대화내용도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가 나눌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반면, 유죄판결을 내린 1심과 2심 법원에서는 똑같은 상황에 대해 성폭력과 임신으로 인해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해자에게 갖게 된 긍정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라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피해자가 자발적인 선택을 했다면 적어도 둘의 관계가 동등해야 함은 기본 전제이다. 42살 연예기획사 대표와 15살 여중생 사이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누가 보아도 기울어진 힘의 관계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법원은 이 피해자가 집을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매일 면회 및 서신을 보내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그리고 성행위 사진유포 협박과 전 부인에 대한 피고인의 폭력행위 목격 등으로 위축된 피해자의 심정 등은 읽어낼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지난 6년 사이에 중학생에서 성인이 된 피해자가 지나온 청소년기를 생각해본다. 성폭력 피해 사실 자체만으로도 고통과 혼란, 분노가 얼마나 컸을까? 임신과 출산을 감당해내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키고 두려움을 느꼈을까? 더욱이 용기내어 고소를 결심하고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대법원에서 뒤집힌 판결을 보면서 이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작년 3월, 전국의 350여개 여성사회단체에서는 ‘연예기획사 대표에 의한 청소년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이 사건의 제대로 된 판결을 촉구하며 기자회견 및 서명운동, 재판부에 매주 의견서를 보내는 활동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사회에 신뢰를 잃어버렸을 피해자 분께 우리가 옆에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작게라도 힘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피해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고 절망과 분노만 안겨준 형사사법절차를 밟아온 그 분께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담은 온기를 보낸다. 최종 판결을 앞두고 있는 대법원은 ‘법의 합리성’이 피해자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잘못 내린 판결이 결국 성폭력을 조장하는 데 일조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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