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의 전차는 3289대였지만, 독일은 2434대에 불과했다. 교전 결과 독일의 기갑부대는 사방을 휩쓸며 승리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그러나 연합군의 전차는 Arras에서의 반격과 Sedan 부근에서 지원을 했을 때 잠시 등장한 것을 제외하고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두 차례의 전투에서 연합군은 참패했다. 원인은 영국과 프랑스 사령부의 전차에 대한 진부한 관념 탓이었다. 전차에 대한 그들의 인식은 기본적으로 1918년 수준에 머물렀다. 전차를 보병의 진격을 돕기 위한 전술적 성격의 돌파도구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전차 사용의 원칙은 보병을 소단위로 분산시키는 것이었으므로, 전체부대의 편제단위도 매우 소규모였다. 

영국과 프랑스에도 전차의 활용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지닌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드골 장군은 군사당국에 마지노선의 무력함과 독일을 물리치려면 기계화 부대를 창설하고 공격정신을 부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미래의 전쟁에서 탱크부대가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서 작용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군사당국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가 1938년 9월 전쟁이 임박했을 때 제1기갑사단을 창설했다. 영국의 리델 하트도 1935년에 국회에 영국이 프랑스로 파견할 원정군에 2~3개의 기갑사단을 포함해 전쟁의 운명을 결정할 시각에 투입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 이러한 상황을 예견한 적이 있었다. 영국의 국회는 우선 동의했지만 계속 딴청을 피우다가 1949년 4월에 간신히 현대적 의의의 기갑사단을 건설했다. 불행하게도 리델 하트의 말이 적중했다.

Sedan이 돌파된 후 퇴로가 차단된 위기에서 Arras에 있던 영국군은 해협으로 곧바로 쳐들어가 독일군 기갑부대의 우익에게 단 1차례 위협적 공세를 취했을 뿐이다. 롬멜의 제7기갑사단이 진격을 하지 못하자 독일군 최고사령부도 신경을 집중했다. 영국의 기갑병력은 2개의 탱크부대에 불과했으므로 처음 얼마간 성과를 올린 후 곧바로 격퇴됐다. 만약 5년 전에 리델 하트가 건의한 대로 2~3개의 탱크사단이 투입됐더라면 전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며, Dunkirk의 참패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전차에 대한 낡은 관념은 대규모 장갑작전단위에 대한 중요성과 절박성을 외면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가 건설했던 탱크사단마저 전시에 분산시켜 사용해야 한다는 압력을 막아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의 탱크는 전쟁이 벌어지자 보병단위에 따라 분산돼 전투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전장에서의 실제 상황을 살펴보면, 분산사용이 전투가 벌어졌을 때 항상 어떤 관건으로 작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탱크는 모든 전투에서 독일에 비해 열세였다. 집중해야 할 전차는 현대화된 기갑전투에 대한 의식의 결핍으로 지상의 다른 병종과 배합하거나, 공군과의 협동작전에서도 고도의 훈련과 연습에 대한 필요성마저 상실했다. 독일에 비할 수는 없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방대한 전차는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했다. 반대로 구데리안을 비롯한 독일의 장성들은 기계화 부대가 돌파, 우회, 포위와 같은 전략적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들은 전통적 부대 편제를 무시하고 탱크가 핵심인 모터화 병종을 대규모 단위로 편제해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이 리드하는 독일군은 현대적 의미의 기갑사단을 편성했다. 이 새로운 유형의 기갑사단이 탱크를 중심으로 편성된 수 있었던 것은 모터화된 보병, 공병, 정찰병, 포병을 보조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량, 규모, 기동성, 돌파력. 속도 등에서 독일군은 질적인 비약을 완성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탱크의 잠재능력도 최대한 발휘될 수 있었다. 독일군이 전격전으로 승리한 것은 탱크의 수량이 아니라 분산보다는 집중을 선택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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