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윤 소설가

 

역기의 설득에 넘어간 여녹은 상장군의 인수를 반환했으나 여씨 일족의 반발이 만만하지 않았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가수가 돌아와 여녹을 꾸짖으며 관영과 제와 초가 연합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으며 이제 돌아갈 나라가 없으니 빨리 조정을 손에 넣으라고 일렀다. 그 사실을 들은 평양후가 승상 진평과 주발에게 일렀다. 진평은 즉시 태위를 보내 황제의 명을 사칭하여 북군을 장악했고, 태위 주발은 북군 사령관으로서 장병들에게 명령했다.

“여씨를 따르는 자는 바른쪽 어깨를 벗고, 유씨를 따르는 자는 왼쪽 어깨를 벗어라.”

장병들은 일제히 왼쪽 어깨를 벗고 유씨 일족에게 붙었다. 태위가 북군을 장악했을 때 여녹은 역기의 계략에 의해 상장군의 인수를 이미 내어 놓고 사라진 뒤였다. 그러나 남군은 아직 여씨의 손 안에 있었다. 승상 진평은 주허후를 불러 태위를 돕도록 명령하고 동시에 군문을 감시하게 했다. 또 평양후를 위위(궁궐의 수문장)에게 보내 상국 여산이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으라고 명령했다.

여산은 여녹이 벌써 북군에서 떠난 것을 모르고 미앙궁에 들어가 반란을 도모하기로 했다. 그러나 궁궐 문에서 저지를 당하고 그 주위를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태위는 여산과 부닥친다는 것은 불안했다. 그는 주허후에게 궁중의 황제를 지키라고 명령하여 호위병 1천명을 보내주었다. 주허후는 미앙궁에 들어가자 궁중에 있는 여산을 발견했다. 그때가 저녁 무렵이었는데 곧바로 여산을 습격했다. 여산이 도망쳤다. 때마침 강풍이 불자 여산의 부대는 혼란에 빠져 저항할 여유가 없었다. 주허후는 여산을 뒤쫓아 낭중부의 변소에서 그를 죽였다.

주허후가 여산을 죽였다는 소식을 듣자 황제는 알자에게 부절을 보내 주허후를 위로했다. 주허후는 알자가 타고 온 마차에 올라 부절을 휘두르며 장락궁으로 달려가 위위 여갱시를 죽였다. 그 길로 북군으로 내달려 태위 주발에게 사실을 보고하자 태위가 머리를 숙였다.

“여산이 문제였는데 덕분에 그가 죽었다. 이것으로 천하가 태평이다.” 그런 다음 여러 곳에 군사를 보내 여씨 일족 남녀노소를 모두 붙잡아 죽였다.

신유날에 여녹을 잡아 죽이고 여수를 태형에 처했다. 또 명령을 내려 연왕 여통을 죽이고 노왕 언의 왕위를 빼앗았다. 그 뒤 중신들이 비밀회의를 열었다.

“지금의 소제를 비롯하여 제천, 회양, 상산의 세 왕은 모두가 혜제의 친아들이 아니다. 여후가 핏줄도 아닌 것을 친자식처럼 속인 데 불과했다. 생모를 죽이고 후궁에서 키워 가지고 혜제로 하여금 친자식이라 일컫게 하고 후사로 삼더니 뒤이어 제왕으로 삼았다. 모두가 여씨 일족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여후의 술책이었다. 우리는 여씨 일족을 뿌리째 뽑아 버렸으니 소제나 제왕들을 그대로 둔다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이 자라서 권세를 휘두르게 되면 다음에는 우리가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이 기회에 유씨 직계의 왕 가운데서 가장 적당한 인물을 골라 제위에 오르도록 함이 어떤가?” 중신 한 사람이 나섰다.

“그렇다면 제왕이 어떨는지요? 제왕이라 하면 도혜왕의 아들이며 도혜왕은 알려진 바와 같이 고조의 큰 아들이요. 지금 제왕은 고조의 적장손에 해당되는 분이니 자격은 충분하다.”

그 말에 중신들이 일제히 반대했다. 여씨가 외척임을 악용했기 때문에 한나라의 종묘가 위태로웠고 유씨 공신마저도 어지러웠다. 문제는 제왕의 외가가 사씨인데 장로 사균이 뱃속이 검은 인물이라 제왕을 황제로 즉위시킨다면 또다시 여씨의 전철을 밟는다는 것이다. 이어서 회남왕의 추대가 나왔으나 너무 젊고 그 역시 외가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대왕이 거론됐다. 대왕은 현재 살아 있는 고조의 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으며 인품이 관대하고 인정이 깊다. 외가인 박씨도 조촐한 일족이다. 게다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세우는 것은 합당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인품은 존경을 받는다.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고 했다. 그렇게 돼서 의견이 모아졌다. 중신들이 비밀리에 대왕을 초청하자 그는 거절을 했다. 그러나 그 뒤 두 차례나 권유를 더 받은 대왕은 마침내 여섯 대의 수레로 장안으로 향했다.

대왕은 윤(기원전 180년) 9월 기유날에 장안에 도착해 대나라의 집으로 들어갔다. 중신 모두는 즉시 그에게 찾아가 옥새를 바치고 황제로서 받들자 대왕은 간절한 요청에 못 이겨 제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문제(文帝) 유항이었다. 혜제와 여태후의 시대, 그것은 백성이 전란의 도탄에서 해방돼 군주나 신하가 모두 평화를 원하던 시대였다. 혜제가 팔짱만 끼고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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