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920년 12월 29일, 이완용은 3.1운동 진압의 공로로 백작에서 후작으로 승작됐다. 당시 후작은 일본 안에서도 몇 명 안 될 정도로 권위가 높은 작위였다.   

1922년에 이완용은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위촉돼 1925년까지 4년간 서예부문 주임으로 활동했다. 이완용의 서예 실력은 뛰어났다. 그의 글씨는 조선 총독 데라우치로 부터 일본 천황의 귀에 들어갈 정도였다. 1913년 10월 11일 이완용은 다이쇼 천황으로부터 휘호를 써 보내라는 ‘천은’을 입는다. 이완용은 즉시 14자의 한시를 비단에 써서 천황에게 바쳤다.   

未離海底千山暗 미이해저천산암
及到天中萬國明 급도천중만국명
해저를 벗어나지 못하니 온 세상이 어두웠는데
천중(천황)에 이르니 만국이 밝아지도다. 

‘암흑 천지였던 온 세상을 일본 천황이 밝게 하였다’는 글씨를 쓴 이완용. 가히 친일매국노답다.    
한편 이완용은 서울 서대문에 있는 ‘독립문’ 현판 글씨도 썼다.

갑신정변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사면령이 내려지자 귀국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7월 2일 독립협회 창립을 주도했다. 

독립협회는 창립총회에서 이완용을 위원장으로 서재필을 고문으로 선출했고, 이른바 ‘정동구락부’라 불린 친미, 친러파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완용도 주미공사를 한 바 있었다. 이들은 먼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독립문 건립을 추진했고 기금 510원을 모았는데 이완용과 이운용 형제가 각 100원씩을 기금으로 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에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한 달 뒤인 11월 20일에 독립협회는 명나라 사신을 맞아들이기 위해 1536년에 세운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세웠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15일자 연재기사인 ‘내 동리 명물’에는 독립문 글씨를 이완용이 썼다고 밝히고 있다. 

“교북동 큰 길 가에 독립문이 있습니다. 모양으로만 보면 불란서 파리에 있는 개선문과 비슷합니다. 이 문은 독립협회가 일어났을 때 서재필이란 이가 주창하여 세우게 된 것이랍니다. 그 위에 새겨있는 ‘독립문’이란 세 글자는 이완용이가 쓴 것이랍니다. 이완용이라는 다른 이완용이가 아니라 조선귀족 영수 후작 각하올시다.”  

1923년 1월부터 이완용은 조선사편수회 고문을 했다. 식민사관에 의한 조선역사 편수에 고문으로 활동한 것이다.   

한편 이완용은 1909년 12월에 명동성당에서 이재명의 칼에 찔려 폐를 다친 이후 천식으로 고생했다. 이런 증상은 나이가 들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는 1925년 가을까지는 전남 화순의 명승지 물염 적벽을 유람하고 11월에는 순종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런데 12월부터는 황해도 장단군에 있는 우봉 이씨 시조 묘제에 불참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완용은 1926년 1월 12일에 중추원 신년 인사회에 참석했다. 사이토 총독이 참석한 행사에 빠질 수가 없었고 경복궁 앞에 신축한 총독부 청사 구경도 할 겸 참석했는데 이것이 이완용의 마지막 행보였다.     

1926년 2월 11일에 이완용은 종로구 옥인동 집에서 68세로 별세했다. 안방에서 편안히 죽은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