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김정남 암살 사건이 막바지로 접어 드는가 했더니 북한의 적극적인 외교 공세와 중국의 미온적 태도 앞에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북한은 외무성 부상(외교차관)을 베이징으로 급파해 대책 외교를 펼치고 있는가 하면 리정철 혐의자도 말레이시아에서 석방되었다. 리길성 북한 외무부 부상이 4일 중국 고위급 인사들과 연쇄 접촉을 마치고 고려항공 편으로 베이징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리길성 부상은 중국 정부 초청으로 지난달 28일부터 이날 오전까지 영빈관인 조어대에 머물면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포함해 류전민 외교부 부부장, 쿵쉬안유 외교부 부장조리 등 중국 외교부 고위급을 만났다.

이번 회동에서 김정남 암살 사건과 중국의 북한산 석탄 수입 금지 등 현안을 집중적으로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왕이 외교부장은 리길성 부상을 만나 “전통적인 중북 우호 관계를 견고하게 하는 것은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라는 말로 북한을 두둔했다. 분위기 전환을 사명으로 중국에 온 리길성 부상은 나름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같은 기간 리동일 전 유엔대표부 차석대사를 말레이시아에 보내 ‘김정남은 심장 마비사, 리정철 석방’ 등을 요구, 리정철이 풀려났다.

지난 3일 말레이시아에서 추방된 리정철은 이날 새벽 베이징에 도착한 뒤 북한 대사관으로 이동해 이번 사건이 “공화국(북한)의 존엄을 훼손하는 모략”이라고 주장했다. 주중 북한대사관에 체류 중인 리정철은 고려항공편이 있는 오는 7일 귀국길에 오를 전망이다.

4일 ABC뉴스와 가디언 등에 따르면 전날 오전 9시쯤 말레이시아를 떠난 리정철은 이날 자정쯤 베이징에 도착했다. 그는 공항에서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다. 이후 베이징에 있는 북한대사관 앞에선 기자들에게 “이번 사건은 공화국(북한)의 존엄을 훼손하기 위한 모략”이라며 “말레이시아 경찰이 날조된 증거로 나를 압박했다”고 말했다.

리정철은 이어 “나는 김정남 피살이 일어난 날 쿠알라룸푸르공항에 있지도 않았다”며 “사건에 사용된 차량과 같은 내용은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현지 IT(정보기술)회사에 다니던 리정철은 화학박사 학위 소지자다. 이 때문에 김정남 암살에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독극물인 VX 제조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또 북한으로 도주한 다른 용의자들의 운전기사로 일하며 실무지원을 담당한 것으로 지목됐다. 리정철 추방에 대해 외교가에선 말레이시아가 북한과의 관계를 부담스러워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말레이시아는 2일(현지시간) “북한과의 무비자 협정을 파기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무역엔 제한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는 등 강력 대응은 하지 않고 있다.

앞서 리정철은 베이징 북한 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겠다고 외신 기자들에게 통지했다. 오전 3시경 20여명의 기자들이 모여들자 대사관 경비 철장 뒤에서 준비한 듯한 ‘모략’ 발언을 약 14분간 이어갔다. “말레이시아 당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어제 추방돼 온 조선민주주의공화국 공민 리정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뒤 “지난 2월 17일 가족과 함께 식사하고 있는 9시 40분 말레이시아 경찰 열일곱명이 무장하고 들이닥쳤다”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그자들(말레이 경찰)이 내가 어떤 살인사건에 가담한 주모자”라며 “자동차의 기름, 집안의 종이, 손전화기(휴대폰)에 공식을 날조해 독약과 관련있다며 얼토당토한 수작을 부렸다”고 주장했다.

리정철은 이어 “우리 가족을 억류한 사진을 보여줬다. 너희 딸이 귀하지 않냐. 아내가 귀하지 않냐. 아들이 귀하지 않냐. 몽땅 체포돼서 감옥에 있다”며 “네가 모든 걸 인정하면 사는 거요. 네가 부인하면 다 죽어야 된다”고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 화학물질이 발견된 쿠알라룸푸르의 고급 빌라 ‘버브 스위츠’를 아느냐는 물음에는 답변하지 않았다. 13일 사건 발생 당시 용의자들을 공항까지 태워줬다는 말레이 경찰의 주장도 부인했다. 자신은 쿠알라룸푸르에서 비누 원자재 무역에 종사했다고 설명했고, 김책 공대를 졸업했다고 해명한 뒤 대사관 직원에 이끌려 정문 안으로 사라졌다. 말레이 경찰이 리정철을 풀어주고도 자신감을 갖고 수사에 임하는 것은 2등 서기관 현광성 등 헤비급을 확보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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