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입춘이 지나니 주변의 사물을 보며 느끼는 생각이 한겨울과는 사뭇 다르다. 꽃샘추위가 한두 차례 남아 있어 아직도 완연한 봄은 멀었지만 창문을 통해 새어드는 햇볕에는 따스함이 묻어난다. 주말 아침이라 바깥 도로에 차 다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조용함이 깃드니 마치 산사나 인적 드문 안식처에 있는 것처럼 내 마음이 평온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일들로 하여 온갖 뉴스들이 뿜어져 나오면서 갈등의 굴레를 헤매고 있음에도 단 몇 시간이라도 그런 복잡한 소식에서 벗어나 있으니 평화롭고 세상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는 아침나절이다.

가끔씩은 잡다한 일상의 흉계와 들뜸을 잊고서 명상에 빠지는 일, 깊은 사색은 아니더라도 현실을 차분히 직시해보면 닥치는 일상이 새롭다. 그래서 주말이면 나는 서재 의자에 앉아 눈을 지긋 감고서 생각하곤 하는데, 가족사 중에서 최근의 좋은 분위기를 떠올리는 일들이다. 예를 들면 지난주에 맞은 큰형님네 농장지경(弄璋之慶) 같은 경사다. 장조카가 아들을 낳았으니 일흔 일곱이 돼서야 첫손자를 본 형님에게는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있겠으랴! 그런 일 아님 생활주변의 인정담긴 이야기나 옛 선현들의 모범적인 사연들, 혹은 좋은 글귀를 잠시라도 마주하고 있으면 정제해진 마음속에서 가정과 사회를 위한 맑은 생각들이 떠오르게 마련이다.

그러한 평온함 속에 잠시 심취되었다가도 다시 일상과 맞닥뜨리다보면 사회 뉴스들은 마음을 어둡게 한다. 그렇더라도 세상 보는 눈을 넓히는 정기적인 사색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은 평상심을 가지게 하며,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지혜를 주니 좋은 일이 아닌가. 알다시피 최근 우리 사회는 정치적 사단(事端)으로 인해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다. 이 사회가 ‘진보·보수’의 이념으로 갈라져 내 편 네 편을 가르고 제철을 만난 듯 정치인들이 활개치고 있는 것이다. 대선에 뜻을 둔 잠룡들의 세치 혀로 달궈진 정치이야기가 경향 각지를 지배하고 있는 요즘 현실이다.

더욱 웃기는 것은 차기 대통령선거와 관련된 일들이다. 벚꽃대선이니 여름 대선이니 섣불리 예상하는 언론의 선거 시기에 편승한 대선주자들의 정책 경쟁이다. 마치 대통령이라도 된 듯 쏟아내는 갖가지 감언이설들, ‘군 복무기간을 단축하겠다’ ‘국민에게 생애자금을 지급하겠다’는 둥 실현가능성은 무시한 채 표심에 관심을 보이는 공염불이다. 그들이 공약한 정책 집행에 들어갈 예산은 숫제 안중에도 없고, 나랏돈이 제 주머니인 양 몹쓸 정책 쏟아내기에 바쁘다.

정치인들이라면, 그것도 대선주자 반열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는 잠룡 입장이라면 지금과 같은 안보·정치·경제·사회 등 제반 분야가 취약한 상태에서 무엇보다 국가사회의 이익과 국민 편안을 우선해야 하는 법이다. 그렇거늘 대선 발품을 파는 잠룡들은 유아독존의 우리 안에 갇혀 있고, 소속 정당이나 그를 지지하는 자들도 마찬가지 행태를 보이는 비정상적인 정치 현실이다. 자신의 허물을 보지 않고서 상대의 취약점을 들춰내기에 바쁜 그런 치졸한 모습들은 분명 국민 모두가 바라는 정치의 변화가 아니며 정치지도자가 가져야 할 정도가 아닌 것이다.

서울 광화문과 청계천 일대를 비롯한 전국 도심에서 주말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떠올리면서 우리 사회의 갈등이 언제 끝날까 적이 걱정해본다. 순간 답답한 마음이 들어 베란다 안 창문을 여니 건너편 아파트 꼭대기 상공에서 해가 찬란히 빛나고 있다. 아침햇살이 서재 안까지 말려들어온 따사로운 온기를 느끼며, 문득 무산(霧山)스님이 동안거 해제법어(冬安居解制法語)에 마지막에 설파한 ‘오늘’이란 시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가재도 잉어도 다 살았던 봇도랑에
맑은 물 흘러들지 않고 더러운 물만 흘러들어
진흙탕 좋아하는 미꾸라지 놈들
용트림 할 만한 오늘’

위 글은 무산스님의 자작시다. 1958년 밀양 성천사에서 사미계를 받은 무산스님은 지난 2014년 3월 이후 백담사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로 추대돼 현재에 이르지만 문학에도 조예가 깊다. 1968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고, 제19회 정지용문학상과 현대시조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해마다 백담사에서 개최되는 만해축전 발전에 공로가 매우 컸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원로스님이 국민을 도탄에 빠트리고 있는 현실정치에 대해, 특히 대통령감을 두고 화두를 던졌다. 즉 나라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삼독(三毒)의 불에 휩싸여있는 이 때 진정한 큰 정치인이라면 삼독의 불길을 잡고, 민심을 잡아야 한다는 시대정신이다. 이 시는 ‘선진한국’을 위해 흙탕물 정치판을 더 이상 용인해서는 안 될 우리 사회의 준엄한 ‘오늘’의 요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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