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도시화 물결이 일던 30여년 전의 일이다. 매일신문에서는 기획특집으로 문인들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소개하는 ‘다시 가본 내 故鄕’ 시리즈를 1984년 3월부터 12월말까지 연재했던바, 경북도내 시군 지역의 특징과 함께 발전상을 알리는 기획물이었다. 여기에 매일신문신춘문예 출신자 등 현역 문인들이 대거 참여했으니, 내 고향 인근지역인 청송에는 김주영 작가, 영양에는 이문열 작가 등이 각자의 빼어난 필력으로 고향을 널리 알렸던 것이다. 영덕(盈德)은 내게 집필의뢰가 와서 동해안 내 고향을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오래전의 옛이야기이다.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고도 남은 옛적 사연을 서두에 다시 끄집어 낸 것은 어린 시절을 고향에서 보내면서 추억을 듬뿍 쌓은 후 장성해서 오랫동안 타향에 머물다 잠시 고향에 들렸을 때, 그간에 변모한 모습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참으로 많은 변화와 재미난 이야기를 전파했던 ‘다시 가본 내 故鄕’ 시리즈가 객지에서 생활하던 출향자들에게 꿈에도 그리운 고향이야기로 데워져 애끈한 향수와 함께 애향심을 배어나게 했으니 당시 인기를 끌었던 특집연재물이었다.

그 글을 쓰고도 오랫동안, 또 꾸준히 고향에 들렀었고, 이번에 영덕에 살고 있는 동생이 우리 형제자매들이 자랐던 고향집을 새로 짓는다기에 나는 여러 가지를 알아보기 위해 올 들어 처음으로 고향 길에 나섰다. 동생과 함께 군청 건설과와 민원실에 들러 집 뒤로 예정돼 있는 도시계획도로 내용과 건축 절차를 알아봤고, 담당과장은 그 집이 주택개량사업 대상에 해당되니 읍사무소에 가서 신청하라는 상세내용 등을 친절히 알려줘서 일고픈 일들은 잘 마무리됐다.

어릴 적 내가 살았지만 지금은 동생이 거주하고 있는 옛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 삼아 시내 산책에 나섰다. 집에서 삼각주가 가까운 거리에 있어 덕곡천 옆으로 난 강변도로를 따라 곧장 걸으면 오십천을 만나게 된다. 오십번을 굽이쳐 흐른대서 이름 지어진 오십천(五十川)은 영덕이 갖는 또 하나의 상징성이다. 읍 소재지 외곽을 돌아 강 하구로 흘러가는 쪽에 삼각주가 형성돼 있어서 여름철이면 동무들과 함께 그곳에서 수영을 하고, 가을에는 긴 언덕길을 걷는 등 삼각주는 어린 시절의 옛 추억들이 많이 서려있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강폭이 좁아진데다가 오십천 강물이 줄어들고 그 형상이 크게 변해 삼각주 옛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인위적으로 변한 것이 있다면 그곳에는 영덕군청에서 2010년 9월에 조성한 삼각주공원이다. 외나무다리와 관련해 상징 조형물과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유행가 ‘외나무다리’ 노래는 반야월 선생이 작사했고, 영화배우였던 고 최무룡 씨가 불러 지난 60년대에 공전의 히트를 쳤던 노래다. 지금도 나이가 든 사람들은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바 그 노래의 배경지가 바로 영덕 오십천의 삼각주 변에 놓여 졌던 외나무다리였던 것이다.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다리/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새파란 가슴속에 간직한 꿈을/ 못 잊을 세월 속에 날려 보내리//’ (‘외나무다리’ 노래 1절).

영덕은 대게로 잘 알려진 고장이지만 복숭아로도 유명하다. 해마다 봄철이면 오십천변의 복숭아밭 일대는 그야말로 무릉도원이다. 덕곡천과 오십천이 마주치는 강가 그곳, 삼각주 건너편 제방에는 과수원이 많아서 봄철이면 복사꽃과 능금꽃이 만발했다. 나는 어린 시절 삼각주를 오가면서 그러한 정감 있는 풍경들을 자주 보았는데, 반야월 선생은 영덕 출신이 아니지만 그 당시에 영덕을 찾았다가 외나무다리에 얽힌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듣고 그 애환을 노래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그 노래는 1962년 발매된 가요앨범 표지로 장식돼 타이틀곡이 됐고, 영화 ‘외나무다리’의 주제곡이 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으니 분명히 영덕의 산물이 아니던가.

삼각주에서 잠시 옛날을 회상하다가 발길을 옮긴다. 그 가까이에 있는 영덕시장, 매달 4일과 9일에 열리는 오일장이 마침 장이 서는 날이어서 시장을 둘러보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상인들은 준비에 바쁠 뿐 손님들은 한산한 편이다. 우리 경제의 어려움이 시골장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시내 한 바퀴를 돌고서 집으로 향하는 시간, 고불봉 산위에서 아침해가 막 떠오른다. 입춘 날, 봄이 오는 길목에서 바라보는 아침해는 경건함을 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고향에서 많은 게 변했어도 불변한 것은 고불봉 위로 솟는 해의 눈부심이었다.

고향이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다. 타향살이 사람들에겐 마음이 찌들고 생활이 공허할 때에 문득 추억어린 옛 생각과 고향 방문은 활기를 되찾아주는 위안처가 될 터,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고향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꿈속에서만 제 고향을 그리워할 테니 안타까움을 어찌하랴! 다행히 나는 봄이 오는 길목에서 다시 가본 내 고향이 여전히 꿈결 같아서 ‘… 새파란 가슴속에 간직한 꿈을 이젠 못 잊을 세월 속에 날려 보내리’ 외나무다리 노래를 불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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