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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희 건축가
어디서 시작된 지도, 언제쯤 마무리 될지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막연히 주저하며 망설인다. 때문에 건축 또한 주저하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한 건축을 택하게 된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결과에 충실하게 된다. 결과에 더욱 엄격하기 때문에 그 과정은 다소 게으르게 된다.

언제 마주쳤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창발(創發)이라는 단어는 건축가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건축가를 창발하는 사람쯤으로 달리 칭해도 그 뜻이 통할 것 같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자신의 공간이 아닌 타인의 공간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다. 그리고 환경과 어우러지는 공간과 그 공간에 머무를 이들의 삶을 녹여내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곤 한다.

자신의 마음도 모른다고 핀잔을 들어도 이유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더 힘들다. 공간에 삶을 녹여내는 일은 너무나 막연한 과정이기 때문에 주변 환경과 길고 짧은 대화에 내포된 단서를 긁어모으는 수집가가 되곤 한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옆집 아저씨 같은 건물이 완성될 것은 자명한 일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단서를 좇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분석해도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인지 찾는 것은 어렵다. 어쩌면 건축은 건축가의 직관에서 창발하는 것은 아닐까?

때문에 종래에는 주변에서 수집한 모든 자료를 거꾸로 끼워 맞추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본다. 그래서 약간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 건축가의 전략이라고 엉뚱하게 노출되는 것은 아닐는지.

혹자는 건축을 두고 공학과 예술의 사이 어디쯤에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건축가가 지향해야 할 모델은 오전에는 예술가로, 오후에는 건축가로 살아온 르꼬르뷔지에라고 생각한다.

창발하는 끼를 생산하기 위한 원동력이 될 예술에 심취하고 현실적으로 지어져야 할 집에 대해서 공학적으로 정확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제도판 앞에서 마무리 하는 것… 그 이상은 없는 일이 아닌가?

본질을 알지 못할 때 미지의 세계를 파헤치는 것은 일을 그르치는 초석이라 생각하며 돌아선다. 그래서 건축의 바탕에는 건축가의 열정이 녹아있을 수밖에 없다.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공간에 타인의 삶을 녹여내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온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부터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마무리 될지도 모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언제나 모든 일이 미궁이다. 우리가 예측할 수 있다면 계산기를 두들겨 풀 수 있는 수식을 정리하듯 시작과 끝을 알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몰라서 아름다운 뒷모습을 동경했다, 여전히 그리워할 뿐이다. 건축가는 투명한 공간과 연애하는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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