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말도 안 되는 말, 공연한 말들이 어지러이 춤을 춘다. 이에 세상도 덩달아 더 어지러워지는 것 같다. 하긴 그럴 때도 되긴 되었다, 모든 선거 중에서도 가장 ‘빅 매치(big match)’인 대통령 선거가 코앞의 대행사로 다가오지 않는가. 대망을 품은 입지자(立志者)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들을 중심으로 편이 갈리는 이 편 저 편 정치인들의 피가 펄펄 끓어 넘쳐 말싸움으로 가는 과잉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이건만 정치인들의 관심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는 데에 우선순위가 주어져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들의 다급한 관심은 온통 탄핵 당한 대통령으로부터 굴러 떨어져 나와 럭비공처럼 구를 이 나라 ‘최고 권력’을 거머쥐는 데 쏠려있는 것 같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듯이 우리 정치 현실은 패거리 풍토와 진영(陣營) 논리가 지배한다. 이런 현실에서는 십자포화처럼 쏟아지는 온갖 악담과 독설이 꼭 상대를 공격해 굴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만 퍼부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신 상대편을 공격해 꼭 얻어지는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내 편의 골수 지지층을 콘크리트 양생(養生)하듯 굳게 결속시키기 위해 불가피하다고 판단할 때 감행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닌가 봐진다. 거친 설전(舌戰)은 사리(事理)의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 진영과 피아(彼我)의 편을 확실히 가르는 전선(戰線)을 형성하며 내 진영의 이완이나 이탈을 막고 단합시킨다. 말하자면 내 편 단합을 위한 립 서비스(lip service)이고 내 편을 위한 편협한 포퓰리즘(populism)이면서 고도의 계산이 깔린 전술일 수도 있다. 대통령 되는 것이 내 진영의 몰표로만 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할지라도 1차적으로 내 진영 표를 잃어서는 대망을 접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애써 특유의 풍토와 ‘현실’을 이해는 하면서도 우리 정치인들의 설전(舌戰)이나 발언이 이기적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라는 발상 탓인지 ‘독기(毒氣, venom)’의 함량이 지나치다는 생각 역시 떨쳐버리기 힘들다. 어떤 때는 이 편 저 편도 아닌 일반 대중이 받아들이기에도 모골이 송연한 때도 없지 않다. 그런가 하면 갈대처럼 소신이 왔다 갔다 할 때도 있고 조삼모사(朝三暮四)로 발언이 번복되기도 한다. 대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내 진영의 결속도 중요하지만 일반 대중으로부터 광범한 공감을 이끌어내어 인정받는 것은 더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인들의 지나친 발언은 결국 자신을 해치게 될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의 정치 불신을 불러 대국적인 차원에서도 이익 될 것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그들의 ‘내편 단속’을 위한 모험적이고 도발적이며 돌발적인 발언은 없어지지 않으며 일반 대중의 정치 혐오 역시 그에 비례해 는다. 

가장 적합한 예(例)가 될지에는 자신감을 갖고 있지는 않으나 어떤 야권의 대선주자는 무엇을 ‘청산’하겠다느니 ‘청소’해야 한다느니 촛불 정신으로 ‘혁명’을 이루어내야 한다느니 하는 발언을 자주 한다. 그가 말하는 ‘청산’과 ‘청소’의 대상은 ‘친일 세력’과 친일과 독재에 힘입은 ‘기득권 세력’을 지칭하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말로서야 묵은 체증을 내리게 할 만큼 시원하고 통쾌하지만 ‘실현’의 방법이 그 자신으로부터도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 굴곡진 역사의 주인공들은 거의 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거나 자연수명을 마쳤다. 그렇다면 그들의 망령과 싸워야 하는가. 부관참시를 해야 하나. 아니면 연좌제를 동원해 후손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새 옥사(獄事)를 일으켜야 하는가. 그렇기에 그의 말은 밑바닥에서부터 안고 있는 막연한 ‘무서움 증’을 그런 일들과 무관한 일반 대중에게까지도 오싹하게 안겨주게 된다. 만약 실현 가능한 현책(賢策)이 그로부터 제시되어 일반 대중이 설득된다면 그의 주장이 힘을 받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이 풍기는 막연한 공포로부터도 벗어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혁명’론 역시, 대망의 달성을 위해서는 내 편뿐만 아니라 피아의 표가 모두 필요한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선거에 나설 인물이 얼른 내뱉을 말은 아니다. 그의 진의(眞意)가 꼭 무엇을 ‘뒤집어엎고 싹 쓸어버리는 폭력 혁명’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혁명이라는 어휘 자체를 입에 담는 것은 자기부정이기 쉽다. 사실 정치권의 거친 언사는 여야를 따질 것 없이 경쟁적으로 튀어나오지만 그들이 그것으로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져드는 것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예컨대 현실 정치 무대에 뛰어난 인물이 하늘에서 갑자지 뚝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있을 수 없다. 여야의 입장은 돌고 돌며 양지와 음지도 그들에게 오고 가며 바뀐다. 그렇다면 모두가 쓴맛 단맛을 고루 맛본 기본적으로는 그 나물에 그 밥인데 갑자기 어떤 인물 하나가 그 판에서 튀어나와 무엇을 ‘청산’하고 ‘청소’하고 ‘혁명’하겠다고 하면 그 자신 역시 그 대상에 포함되기 쉽다. 자신이 미처 태어나지 않아 현실로 살지 않았던 시대나, 선대들이 도덕적으로 유리하게 살았다고 주장할 만한 역사의 먼 부분을 얘기한다 해도 개인 누구의 역사적인 삶도 까마귀 무리 속의 백조였다고 절대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그렇게 단순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한편 어떤 정치인은 느닷없이 늙은이를 내다 버리는 ‘기로(棄老)’의 전설을 연상케 하는 발언을 토해내어 물의를 샀다. 그는 ‘65세 이상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던가. 이 역시 습관화된 우리 정치권의 ‘패가름’ 의식의 산물로 보인다. 하지만 너무 미련하지 않았나. 자신의 보스(boss)에 비해 유력하고 나이 많은 타 진영 대권후보를 배제하고자 하는 충성심은 기특하게 잘 보여주었는지는 모르지만 ‘70대가 신중년(新中年)’이라고도 하는 시대에 나이의 경계선만이라도 훨씬 더 멀리 잡았어야지. 물론 세대 간 편가름이요, 사회적 고려장(高麗葬)인 그런 소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치인의 입에서 안 나왔어야 최선이었던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이 안 살아봤다 해서 기력이 아직 왕성한 자신을 기른 부모나 선배 같은 세대를 생물학적 나이로 고려장 하려들면 도리어 자신이 먼저 고려장 당할 수 있다. 왜냐. 무엇보다 균형 잡히고 조화로운 애민(愛民) 의식의 결핍과 사람과 인생에 대해 무지를 드러낸 사람이 어찌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보스는 가깝고 국민은 멀다고 느껴졌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정치인으로서 얼마나 중대한 실수인지는 알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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