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0월 26일은 안중근 의거 107주년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1879~1910) 의사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사살했다.  

오전 9시경 이토 히로부미를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멈췄다. 이토는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와 약 25분간 대화를 나눈 뒤, 의장대를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의 인사를 받았다.   

안중근은 이토가 10여보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3발을 쏘았고, 이토는 고꾸라졌다.     

안중근은 저격 후 ‘코레아 우라!’(‘대한국 만세’의 러시아어) 삼창을 외친 후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시간은 9시 30분이었다.

안중근은 역 구내 러시아 헌병대 분소에서 러시아 검찰관의 심문을 받았고, 밤 8~9시경 일본 영사관 지하 감방에 구금되었다. 

10월 30일에 일본 검찰관이 이토를 죽인 이유를 묻자, 안중근은 당당하게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등 15가지 이유를 댔다. 

11월 3일에 안중근은 뤼순감옥에 이감됐고, 1910년 2월 12일 안중근은 법정에서 ‘이토를 개인적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대한의군 참모중장 신분으로 행한 것이다. 나는 전쟁 포로이니 국제공법에 의해 처리하라’고 최후 진술했으나, 2월 14일에 일본 재판장은 안중근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사형을 선고했다. 3월 26일에 안중근은 뤼순감옥에서 순국했다. 나이 31세였다.

#2.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소식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이토 암살사건’이라 칭하고 안중근을 흉한(兇漢: 테러리스트)으로 몰았다. 

일본은 뤼순감옥에서 찍은 단지(斷指) 손이 잘 보이도록 가슴 가까이 얹은 초췌한 모습의 안중근 사진을 우편엽서로 제작하면서, 하단에 “이토공을 암살한 안중근” 제하에 “한인(韓人)은 고래(古來)로부터 암살의 맹약으로 무명지를 절단하는 구관(舊慣)이 있다”라는 저주의 문구를 적어 판매했다. 

중국은 안중근을 영웅으로 추앙했다. 양계초는 ‘가을바람이 부니 이토 히로부미를 단죄하네(秋風斷藤曲)’란 시를 지어 찬양했고, 훗날 중국 총리 주은래는 “(조선과 중국) 두 나라 인민의 일본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이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3. 2014년 1월 19일 중국 하얼빈역 내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개관됐다. 다음날인 20일에 일본 정부대변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안중근 의사 기념관 개관에 유감을 표시하며, “안중근은 일본 초대 총리 이토를 살해, 사형 판결을 받은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했다. 

고무적인 것은 1980년대 이후 안중근에 대한 소설이나 전기가 일본에서 많이 간행돼 안중근을 독립운동가, 평화운동가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점이다. 심지어 도쿄 품천구 교육위원회가 1996년에 제작한 이토 히로부미 묘소의 안내판에는 ‘이토가 조선의 독립운동가에 의해 저격당해 69세에 숨졌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한국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이기동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의 저서 ‘비극의 군인들 - 일본 육사 출신의 역사’가 친일파 옹호 논란에 휩싸였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는 표현도 문제가 됐다.       

한국은 역사 시계가 거꾸로 돌고 있다.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폄하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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