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9일 강화 교동도 대룡시장을 방문했다. 6.25 전쟁 이후 이북에 고향을 둔 피란민들이 이곳에 정착해 형성된 곳이다. 60~70년대의 영화 세트장 같은 대룡시장의 골목은 지금은 적막감이 흘렀다. 쥐를 잡자 등 옛 선전 포스터와 할머니가 등에 업은 아이에게 국수를 먹이는 모습의 벽화는 피란민 시절부터 새마을운동 때까지의 모습을 잘 표현해준다. 유난히 제비가 많았고 집집마다 제비집이 있었다. 교동 이발관 간판은 촌스럽지만 정겹다. ⓒ천지일보(뉴스천지)

60~70년대 피란민들이 모여 만든 삶의 터전
‘쥐를 잡자’ 벽화와 ‘약방’‘잡화’ 등 촌스럽고 정겨운 간판들
6.25 이후 이북에서 내려와 정착
 “이젠 이곳이 고향이야”

[천지일보 강화=손성환 기자]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인천 강화 교동도 대룡시장은 6.25 이후 60~70년대의 모습이 남아 있다.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형성된 이곳은 뻥튀기 파는 아저씨, 등에 업은 아기에게 국수를 먹이는 할머니의 모습이 벽화에 그려져 있다. 대룡시장의 일상을 표현한 것이다.

‘쥐를 잡자’ ‘둘만 낳아 잘 키우자’ 등 지금은 우습기만 한 선전물도 눈에 띈다. 또 다른 벽화에는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모습, 등목을 하는 모습 등의 그림도 있다. 지금은 어른이 돼서 도시로 떠난 옛날 이곳 아이들의 모습이다. 지금은 70~80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 강화 교동도 지도. 강화도에서 교동대교를 건너면 교동도에 이를 수 있다. 민통선 지역이기 때문에 해병대의 검문을 통과해야 한다. ⓒ천지일보(뉴스천지)

◆북한과 인접한 민통선 섬 ‘교동도’

지난 8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한 ‘교동도’를 방문했다. 교동대교의 시작점인 인화삼거리에서 출발해 대룡시장까지 총 7.7㎞거리. 승용차로 약 11분 거리이지만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지역이기 때문에 5분 정도 해병대 초소에서 인적사항 기입과 출입 안내증을 받고 설명을 들었다. 예전에는 배를 타고 15분을 가면 교동도 월선포 선착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지난 2014년 7월에 교동대교가 처음 놓여졌다.

교동도에 들어서니 넓은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8월 말에 이곳을 온 터라 뜨거운 뙤약볕에 벼가 익어가며 초록과 노란 물결이 파도쳤다. 교동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한 면적 46.90㎢, 인구 3600여명이 거주하는 작은 섬이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왕족의 유배지였다고 한다. 연산군과 광해군, 세종의 삼남인 안평대군, 선조의 첫째 서자 임해군, 인조의 동생 능창대군,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등이 이곳으로 유배됐다. 1950년대 6.25 이후 교동도는 피란민들이 이북으로 가지 못하고 정착한 곳이 됐다. 지금은 영화 세트장을 옮겨온 듯 60~70년대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모습이다.

▲ 교동도 대룡시장 골목은 현재와 과거가 공존했다. 황세환 어르신의 시계방엔 괘종시계 등이 보였다. 옛 모습을 나타낸 벽화는 정겹다. 새마을운동 때 슬레이트 지붕을 만들었고 작은 골목은 운치가 있었다. 거북당이란 간판을 단 빵집도 예스럽다. ⓒ천지일보(뉴스천지)

◆6.25 후 피란민에 의해 형성된 ‘대룡시장'

강화 교동도는 특히 대룡시장 골목이 유명하다. 6.25 이후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만들어진 시장이다. 골목길 사이로 보이는 간판들과 모습들은 옛날 모습을 하고 있다.

골목은 성인 2~3명이 통행할 수 있을 정도로 좁다. 길이도 약 400미터로 뭔가 더 나올까 싶어 걸어가다가 금방 길이 끝났다. 여느 지방의 시장들보다 작은 규모다. 수십년간 평화로운 분위기 때문일까 제비들이 많이 날아다녔다. 가게마다 제비집이 여럿 있었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건물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이름들도 예스럽다. ‘미장원’ ‘강화상회’ ‘담배·잡화’ ‘거북당’ ‘제일다방’ 등. 시계방에는 옛날 괘종시계가 보였다. ‘대룡시장의 명장, 황세환 어르신의 시계포’라고 유리문에 적혀있다. 시계방 주인은 자리를 비웠지만 오래되고 다양한 시계들이 대신 반겨줬다.

한 잡화점은 내부에 불을 때서 그을린 구들장 아궁이도 보였다. 처음 피란민들은 움막을 짓고 떡과 국수를 팔며 살았다고 한다. 새마을운동 때 초가를 슬레이트 지붕과 양옥으로 바꿀 수 있었다. 촌스럽지만 정겨움이 묻어났다.

▲ 나의환(85)옹은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때 미군부대에서 무전을 담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북 고향을 가지 못하고 교동도에 정착했다. 이제는 이곳이 고향이란다. 동생과 자녀들, 손주들은 미국에 산다고 한다. 미국에 사는 가족들의 사진과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새로 받는 무공훈장이라며 꺼내 보여줬다. 오래된 약 상자와 긴 의자는 나의환옹이 50년간 이곳에서 약방을 운영한 세월을 대신 말해준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인천상륙작전 참전용사 ‘약방 할아버지’

대룡시장 골목에는 ‘동산 약방’이 있다. ‘약국’도 아닌 ‘약방’이다. 궁금함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7~8평(약 25㎡)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엔 ‘몰트헤모구로빈’이라고 쓰인 낡은 나무 약장이 가장 먼저 보였다. 약장 안에는 ‘안티푸라민’ ‘니라마이드 구급약’ 등이 있었다. 구석에는 제약회사가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대한중외제약’ ‘복합 아루사루민’이란 글씨가 박힌 긴 의자가 있었다.

약방 주인 나의환(85) 옹은 “내가 대룡시장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이 건물도 가장 오래됐다”고 소개했다. “교동도에서 57년 동안 약방을 했어. 이 옆에 집에서 하다가 30년쯤 전에 지금의 이곳으로 옮겨왔지. 이 약장도 그때 물려받았어. 사람들이 오면 나도 사진 찍고, 저 의자도, 이 30년 넘은 스덴(스테인리스) 주전자도 찍어가곤 해.”

학창 시절은 서울 아현동에서 보냈지만 고향은 이곳 교동도라는 그는 동생을 비롯해 자녀들이 미국에 있다고 사진을 보여줬다. “딸은 미국 뉴욕주립대 의대 교수야. 나랑 닮은 이 사람은 내 동생이야. 손자들은 이번에 미군에 입대하는데 자원해서 한국에 온대. 나 보려고.”

그는 대통령이 새로 바뀔 때마다 새로 수여된다는 무공훈장도 보여줬다. 6.25 전쟁 당시 강원 대관령 지역에서 3사단 공병대에 있다가 미군 부대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영어를 할 줄 알아서 미군 부대에 들어가 통역과 무전을 맡았어. 옛날엔 말할 수 없었던 건데 이제 말하네. 미군 부대 어디든 통행할 수 있었지.”

이북이 고향이었지만 전쟁 때문에 교동도로 와서 이곳이 고향이 됐다는 그는 자신의 부인과 함께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50년간 약방을 하며 자식들을 다 키워낸 노부부는 수십년간 자신을 찾아준 이웃들과 가끔씩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과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건강하세요. 또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약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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